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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갈항사지동서삼층석탑(葛項寺址東西三層石塔).국립중앙박물관 본문

☆~ 바람소리/박물관

김천 갈항사지동서삼층석탑(葛項寺址東西三層石塔).국립중앙박물관

푸른새벽* 2007. 2. 21. 00:31

 

 

 

 

 

 

갈항사삼층석탑(葛項寺東西三層石塔)


갈항사삼층석탑은 건립연대가 밝혀진 많지 않은 신라 석탑의 하나라는 점,
신라시대 석탑으로는 유일하게 기단부에 금석문이 남아 있다는 점,
석가탑,즉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완성을 본 신라 석탑의 전형양식이 어떻게 경주를 벗어나 파급.확산되는지를 예증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조형미의 우수함 등의 이유로 1916년의 그 수난 이후 줄곧 이 방면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이들 탑의 건립연대는 동탑 상층기단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경덕왕 17년,곧 758년으로 밝혀졌다
이때는 신라가 통일 이후 한창 난숙한 문화의 꽃을 피우던 때로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영되던 무렵이기도 하다
녹록치않은 장인의 솜씨를 기대해도 좋을 시대였던 것이다


이 탑에는 풍경이 달리는 지붕돌 네 귀퉁이말고도 몸돌에 못구명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여러 개 남아 있다
보령 성주사터 서탑이나 경주박물관 뒤뜰에 서 있는 고선사터 석탑 정도에 보이는 특이한 점이다
연구자들은 사천왕상이나 보살상,아니면 천의를 휘날리는 천녀들이 새겨진 금동판 따위의 금속판을 고정시켰던 흔적으로 보고 있다
세 곳 모두 왕실이나 귀족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절이고 보면  왜 그렇게들 화려하게 탑을 장식했는지 수긍이 간다


대충 보아도 전형적인 우리 나라 삼층석탑의 특징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중의 기단,상.하층 기단에 각각 두 개씩 도드라진 탱주와 우주,지붕돌의 층급받침이 다섯개씩인 점,
지붕돌의 처마선이 직선을 이루고 낙수면과 전각의 반전이 심하지 않고 은은한 점 등등
좀 다른 점이 있다면 하층기단의 지대석.면석.갑석이 한 돌로 이루어져 조각양식이 얼마간 편화(便化)됨을 보이는 정도일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아담한 크기에 적절한 비례,소박하고 건실한 미감이 돋보이는 석탑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석가탑 이후 가장 풍치 있고 아담한 탑"으로 꼽기도하고,
아담하지만 균형 잡힌 몸매나 아름다운 조화로 미루어 신라 전성기의 어느 명공의 회심의 역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기도 한다
국보 제 99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김천 갈항사지 동ㆍ서 삼층석탑(金泉 葛項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국보 제99호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갈항사터(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 소재)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다.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져 있는 탑이다.
*문화재청자료*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있다)

 

 

갈항사 삼층석탑의 동탑에 새겨진 명문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