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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慶熙宮).서울 종로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경희궁(慶熙宮).서울 종로

푸른새벽* 2007. 10. 30. 17:14

경희궁(慶熙宮)


조선시대의 궁궐 중 인위적으로 가장 철저하게 파괴된 곳이 경희궁(慶熙宮)이다


17세기 초반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창건된 이후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이궁(離宮)으로
290여 년 동안을 존속해왔으나,
대한제국(大韓帝國)시대 일제에 의해 1907~1910년의 단 3년 사이에 훼멸됨으로써
궁궐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일제는 이곳에 일본인 학교를 세웠다
궁궐 터 또한 축소되고 파괴되었는데,1980년 대의 발굴 조사 결과 신문로 옛 서울고등학교가 있던 터에
이곳이 궁궐이었음을 보여주는 유구(遺構)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崇政殿)의 기단부와
일부 석수(石獸)및 노주석(路柱石)과 댓돌 등뿐이었다
이 밖에 바위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남아 있었으며,
신문로 2가와 당주동,내수동의 경계 지점에 궁역(宮域)을 추정할 수 있는 담장이 남아 있었다
현재 옛 궁터에는 숭정전 일곽과 자정전(資政殿)및 태녕전(泰寧殿)등이 복원되어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9년(1617)에 창건키로 하여 3년 후인 12년(1620)에 완공되었다
이처럼 궁궐 영건이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는 인경궁(仁慶宮)의 창건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인경궁은 창덕궁의 제도를 전범으로 삼은 큰 규모로 계획되었으며
경희궁은 소궐(小闕)로 지칭되었듯이 창경궁의 제도를 전범으로 삼아 소규모로 계획되었다
공사 기간내내 공역의 정지나 규모의 축소를 주장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으나 광해군은 경희궁의 공사를 강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물자를 조달한 사람들에게는 벼슬을 제수하는 등의 편법이 횡행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경희궁 창건 당시의 규모는 정전.침전.동궁.제별당 등 1500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경덕궁은 창건 이후 70여 년이 지난 19년(1693)에 일부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순조 29년(1829)에는 큰 화재가 발생하여 전각의 거의 절반 정도가 소실되었다
이듬해 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설치하여 순조 31년에 중건을 마쳤는데
이때 공사의 내용은『西闕營建都監儀軌(서궐영건도감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정사를 살핀 마지막 임금은 철종이다
창덕궁에 거처하던 철종은 재위 11년 9월에 이곳으로 이어하여 약 7개월 동안 거처하였다
따라서 철종이 떠난 12년 4월 이후에는 사실상 왕궁으로서의 기능은 끝이 났었다
고종 시대의 경희궁은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황폐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만,대한제국시절 경운궁과 구름다리가 연결되기도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경덕궁에 처음 입거(入居)한 임금은 인조였다
반정 당시 창덕궁이 소실되었던 데다,이괄(李适)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에 타버림으로써
공주까지 피난길에 올랐던 인조는 인목대비(人穆大妃)를 모시고 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여 10년 가까이 거처하였다
이 기간 동안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임금이 강화도로 몽진하기도 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된 이후에도 즉위 후 이곳으로 이어한 현종 등 여러 임금들이 경덕궁에 머물렀다
숙종은 이곳 회상전에서 태어나 융복전에서 승하하였으며 경종은 이곳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영조는 1760년,그때까지의 궁호이던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고쳤다
이는 추존왕 원종(元宗)의 시호(諡號)에 들어 있는 경덕(敬德)과 같은 음(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영조 역시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승하하였으며,정조는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또한,순조는 이곳 회상전에서 승하하였고, 현종은 역시 승정문에서 즉위하였다


경희궁은 일제 시대에 워낙 철저하게 훼손되었는바,
그 전각들의 정확한 배치나 형태를 알 수 없으나『宮闕志(궁궐지)』의 기록 및「西闕圖案(서궐도안)」을 통해 어느정도 추정할 수 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달리 경희궁의 전각 배치는 외전(外殿)과 내전(內殿)으로 좌우로 나란히 놓이고

정문 또한 중심 축에서 동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다


경희궁에는 수많은 전각들이 있었지만,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사라지고 극히 일부만 다른 곳에 이건되어 있었으며
숭정전 일곽과 자정전 및 태녕전이 최근에 복원되었다
그나마 옛 건물로서 현존하는 전각은 숭정전과 흥화문,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黃鶴亭)뿐이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경희궁지(慶熙宮址)


사적 제271호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문화재청자료*

 

 

서궐도(西闕圖)

서궐도의 사진은 검색자료에서 가져온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