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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화문(興化門).서울 경희궁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흥화문(興化門).서울 경희궁

푸른새벽* 2007. 10. 31. 00:33

 

 

   

 

 

 

흥화문(興化門)


경희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우진각 지붕 건물이다
경희궁 창건 당시 궁궐의 동북쪽 모서리에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돈화문(敦化門)이나 홍화문(弘化門)이 중층인데 비해 흥화문이 단층인 이유를『光海君日記』에서
'경덕궁은 다만 피우처(避寓處)이므로 단층문(單層門)을 찰조(察造) 하라'고 적고 있다
즉,경희궁이 별궁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다만,다른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돈화문.홍화문 등과 마찬가지로 이름 가운데 '화(化)'자가 들어 있다
원형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앞면과 뒷면에 각각 네 개씩의 기둥을 배열하였고
가운데에는 다소 가는 기둥 넷을 배열하여 판문을 두짝씩 달았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걸고 그 위에 외이출목 내삼출목의 공포를 놓았으며,
가운데 칸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좌우 협간의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양성을 한 지붕 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을 얹어 장식하였다


흥화문은 여러 차례 이건되는 수난을 당하였는데,1915년에는 당시의 도로 공사 때문에 남쪽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은 박문사(博文寺)로 이건되어 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그 뒤에도 오랜 세월을 신라호텔의 정문 노릇을 하고 있다가 1988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자리,즉 옛 서울고등학교의 정문 터에 복원되었다
그러나,현재의 위치도 원래의 흥화문이 있던 자리는 아니다
흥화문이 원래 있던 자리인 구세군회관 앞에는 그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漢京識略(한경지략)』에 의하면,흥화문의 현판 글씨는 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명필 이신(李神)이 썼다고 하지만,
현재의 글씨는 그의 글씨가 아니다
또한,옛날 시중에서는 경희궁을 일러 '야주개대궐(夜照(珠)峴大闕)'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밤이면 광채를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경희궁흥화문(慶熙宮 興化門)


시도유형문화재 제19호(종로구)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경희궁지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의 정문이다.


그러나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건립하고자 궁내의 많은 전각을 헐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 후 일제는 1932년 남산 자락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해방후 박문사는 폐사되고 흥화문은 영빈관(迎賓館) 및 신라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移轉) 복원하였다. 그러나 원 자리는 동향을 보고 배치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현재 찾기 힘들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의 다포 양식 건물로, 정전인 숭정전, 황학정과 더불어 건축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자료*

 

 

*흥화문

안쪽 왼편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흥화문은 한때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 박문사의 정문 노릇도 했어야 했고

또 오랜 세월을 신라호텔의 정문이어야 했다

1988년에 이르러 현재의 자리에 정착하였으나 예전에 있던 그 자리는 아니다

 

 

*흥화문 편액

옛날에는 이 현판의 글씨가 밤에도 광채를 냈기에

경희궁을 일러 야주개대궐이라고도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