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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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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후기

다시 또 그곳에...거돈사터

푸른새벽* 2008. 2. 17. 04:13

이 만큼의 세월을 살아 내면서

더러더러 잃어버리고 더러더러 잊어버리는 것이 기억이라면

내 생이 다 하는 그 순간까지도 잊혀지지 않을 것은 추억이리라

 

아픈 기억...

그것 역시 추억이라 이름 지어 말 할 수 있을지

싸매고 또 싸매고,매듭을 짓고 또 지어 가슴 한켠에 밀어 두었던 기억 하나

그리도 단단히 갈무리 해두었었건만

어느 순간 의도하지 않았는데 스르르 맥없이 풀리는 매듭

대책이 없다

그래서 나섰다

그래 맞닥뜨려 보는거야

 

 

어느 계절이었던가

내가 거돈사터를 처음 찾았던 것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어 온 석축을 기어 오르는 담쟁이 덩굴

아래쪽의 담쟁이 덩굴은 푸르렀다

윗쪽 담쟁이 덩굴은 붉었었다

석축을 기어오르느라 피멍이 든 것 처럼...

 

 

 

 

 

해를 넘겨 다시 찾은 거돈사터

푸르던 담쟁이덩굴도,붉게 피멍이 들었던 담쟁이도...없다

서슬푸른 계절에 다 삭아버렸다

 

살아낸 세월 만큼 겁도 많아지는지

눈 쌓여 풍성한 날은 그저 꿈만 꿀 뿐

자동차 미끄러질까봐,걷다가 넘어질까봐 겁나서 항시 벼르기만 하던 곳

스르르 풀린 매듭 다시 지을 힘 없어 이리 매운 날 대책없이 찾아 왔다  

 

 

 

 

 

넓디 넓은 그 만큼 아늑한 곳

폐사지의 쓸쓸함 만큼 편안하고 차분한 곳

반갑습니다

천년의 세월동안 절터를 지켜주신 느티나무님

반갑습니다

금당터 앞의 삼층석탑님

반갑습니다

금당터의 불대좌님

 

 

 

 

 

넓디 넓은 절터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삼층석탑

하루종일 바라보아도 좋을 것 같은 탑

 

 

 

 

  

잘 생기지는 않았으나 정감있는 삼층석탑 앞에는

이렇듯 복스럽게 핀 연꽃을 새긴 배례석이 있다

 

가슴이 시리다

그리도 애써 묶어 두었던 매듭을 힘없이 풀리게 했던 것

이 배례석...

 

 

 

 

 

복스럽고 이쁜 배례석 둘레의 네 면에는 안상도 뚜렷하다

 

 

 

 

 

 누군가 이야기했다

돌아가는 것은 추억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나는 추억에 기인해 돌아갈 곳이 있기나 한 건지...

 

 

 

 

 

 비단 부처님을 따르지 않더라도 누구나 반드시 지니야 할 것은

고요할 때의 기상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곳 거돈사터에서 고요할 때의 기상을 헤아려본다

 

금당자리의 깨어진 불대좌 옆

방금이라도 날아갈 채비를 마친 민들레 홀씨를 만난 것이 언제 쯤이었나...

 

 

 

 

 

그랬다

그 때는 까치밥 감 만이 남아 있을 때 였다

그런데

철 잊은 민들레홀씨

그리고

철 몰랐던 나...

 

 

 

 

 

기억을 못하는 인간이 병든 것이 아니라 잊지 못하는 인간이 병든 것이라했다

기억은 집착할 수록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사랑했던 한 사람을 끈질기에 기억하는 것은 사랑할 수도 있었던 여러 사람을 잊게 만들고,

아름다웠던 추억 하나만을 반복해 상기하는 것은 아름다울 수 있었던 수많은 다른 추억을 몰아낸다

망각은 유령처럼 현재의 발목을 잡는 과거에서 벗어나도록 인간에게 선사된 커다란 재능이라는 것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두개의 의자...

 

 

 넓은 절터 제일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원공국사부도비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춥지는 않으신지요

 

 

 

 

   

절터를 정리하며 다시 옛모습 살려 쌓은 석축

그 세월도 만만찮을텐데 아직도 석축은 부드럽지 않다

멀리 부도가 있던 자리에 창백한 부도 하나

작년엔 분명 없었다

 

원공국사부도는 중앙박물관 뜰에 있다

그렇다면 저 곳의 부도는 중앙박물관의 부도를 본따 새로 만들었나보다

 

 

 

 

 

먹먹하던 가슴이 뚫리는 풍경이다

그래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을거야...

 

 

 

 

 

저~기 뽀얗게 보이는 곳이 폐교가 된 정산초등학교일게다

그 곳에 짝 잃고 널부러져 있는 당간지주 가 있다고 했지

 

 

 

 

 

무엇에 씌였던가 전에는 놓치고 지나쳤던 장승

세탁소에 가기전 옷을 뒤지다 주머니에서 지폐뭉치를 발견했을 때의 기분~

 

 

 

 

 

내가 만나 본 장승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곳 정산리의 장승은

문득 경기 광주의 엄미리 장승을 떠올리게 했다

참 많이 닮았다 

관리가 잘 된 잘 생긴 장승에서 이곳 정산리 마을 사람들의 정성을 본다

 

 

 

20여 기 가까운 장승들 중에서 가장 잘 생긴(?) 장승...

 

 

 

폐교된 정산초등학교

교문을 자물쇠로 채워 놓았다

그러나 염려없다

교문 바로 옆 잡풀을 헤치면 들어갈 수 있으니까

 

 

 

풍금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있었을 학교

잡풀 무성한 운동장에는 검은 비닐하우스와 낡은 경운기와 적막 뿐이지만

하얀 창틀을 보니 문득 내 어릴적 다니던 학교의 양호실 생각이...

 

 

 

제 짝을 잃고 널부러져 있는 당간지주

옛날에 남매 장사가 어디선가 잘 다듬어진 당간지주를 옮겨 왔는데

하나만 갖다 놓은 채 그만 남동생이 죽고 말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 있는 당간지주의 짝은 지금도 현계산 동남쪽에 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남아 있는 당간지주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짝도 잃고 할 일도 없이 심드렁히 누워 있는 당간지주와 푸른 비닐...

 

 

 

학교 교문 바로 앞에 있는 건물

학교의 선생님이 사용했던 관사가 아니었을까

 

 

 

내가 진정 누구인가를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내 몸이 점하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 놓이는 장소이지만

현실은 힘이 세다

시퍼렇게 눈 뜨고 노려 보는 현실 앞에서 나는 그냥 한번 품어보는 꿈조차 마음대로 꾸지 못한다

현실은 상상력까지 구속한다

내가 꾸는 꿈의 구체적 양상이 역설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것은

나의 현실이 얼마나 초라한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라한 현실이 또 얼마나 강력한가 하는 것이다

이제 돌아가리라

비록 현실이 초라할 지라도 그 현실의 막강한 자장(磁場)안에서 나는 힘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풀리지 않을 매듭을 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