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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소백산 용문사(小白山龍門寺).경북 예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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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소백산 용문사(小白山龍門寺).경북 예천

푸른새벽* 2008. 3. 18. 00:03

 

 









 

 





 









 

 









 





 

 





 





 





 









 

 





 









 

 









 

 





 





 





 









 

 









 





 





 

 





 

소백산 용문사(小白山龍門寺)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391


용문사 일주문에 이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근래 새로 낸 길이고 오른쪽은 옛부터 있던 길로,해운루 밑으로 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예천군 산천조에는 용문산을 이르기를 "신라때에,고승 두운(杜雲)이  이산에 들어가서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고려 태조가 일찍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는 길에 여기를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갔다.동구에 이르러 홀연히 용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용문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이것이 용문산 이름의 유래다.


두운은 두운동 태생의 사람으로 속성은 신씨로 알려져 있다.당나라에 다녀온 뒤 이곳에 초막을 짓고 두운암이라는 암자를 내고 있었으니 신라 경문왕 10년(870)의 일이다.이때는 신라 하대로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할 때이다.한편으로 궁예의 태봉,견훤의 후백제가 일어서서 이름하여 후삼국이 쟁패를 벌이기도 했다.궁예의 휘하에 있던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하던 중에 이 절에 들렀는데 길목의 바위 위에 용이 앉아 있다가 왕건을 반겼다고 한다.그것이 실제의 일이었다고 할 순 없으나,왕건이 문경을 비롯하여 이 근방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던 것은 기록에도 전하는 일이다.용의 환영이었건 이 지역민의 환영이었건 아무튼 그것이 큰 힘이 되었던 듯 왕건은 935년에 옛일을 생각하고 절을 크게 일으켜주었다.그때부터 용문사는 고려 왕조 내내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유지하며 번창의 길을 걸었다.


태조는 해마다 쌀 150석을 하사하였고 의종 때인 1165년에도 왕명으로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명종 때인 1171년에는 절문 밖 왼편 봉우리를 태자의 태(胎)를 묻는 곳으로 정하여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었다.이때는 1170년에 일어난 무신난 이래 다시 무신들을 치려는 세력도 만만치 않아 정치정세가 어수선한 때였다.1173년에는 동복면 병마사였던 김보당이 난을 일으켰는데,이때 용문사에서는 3만 승려를 모아 대법회를 열기도 하였다.두운의 법맥은 고려시대를 통해 영련.조응.자엄으로 이어졌다.


척불숭유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용문사는 왕실로부터 대정을 많이 받은 편이다.세조 3년(1457)에는 왕이 잡역을 감해주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 교지가 보물 제729호로 지정되었다.성종 9년(1478)에는 소헌왕비의 태를 이곳에 안장하였으며  조선 후기인 정조 7년(1783)에 와서도 문효세자의 태를 안장했을 정도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유지했다.그러다 조선 말기인 1835년 이후부터는 불에 타버려 전각을 다시 세운 기록이 여러 번 된다.특히 1984년에는 보광명전.해운루.응향각.영남제일강원.요사.종무원 등 건물이 230평이나 타버렸다.전각들을 새로 세우면서 용문사의 사역을 대대적으로 개축하는 바람에  주변의 나무들을 쳐내고 절 마당을 넓게 닦아내어,조선시대의 학자 서거정이 이 절을 두고 "산이 깊어서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 라고 했던 때의 아늑함과 포근함은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용문사는 보광명전이 본전이지만,연륜은 그 동쪽에 있는 대장전이 높다.보광명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응향각.원통전.산신각.천불전이 조금씩 축을 달리 하면서도 거의 일직선을 이루면서 층층이 앉아 있다.보광명전 동쪽으로는 대장전을 중심으로 진영당.응진전.명부전 등이 오순도순 모여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