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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내연산 보경사(內延山 寶鏡寺).경북 포항 본문

☆~ 절집.절터/경 북

포항 내연산 보경사(內延山 寶鏡寺).경북 포항

푸른새벽* 2008. 4. 14. 13:44

 





 





 





 

 









 





 





 

 

 









 





 

 









 

 





 





 





 





 





 





 





 





 





 





 

내연산 보경사(內延山 寶鏡寺)

 

포항시 송라면 중산리


보경사도 대부분의 다른 절처럼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고려 고종 1년(1214)에는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승방 4동과 정문 등을 중수하였으며 범종.법고 등도 완비하였다.조선조에 들어선느 1677년부터 1695년까지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져 보경사로서는 가장 큰 한 시절을 맞는다.그뒤 영조1년(1725)에도 부분적인 손질이 있었고,20세기 이후에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로 이어졌다.


절이 있으면 그 절에 삶을 기댄 사하촌(寺下村)이 있는 거야 우리네 절 가운데 열에 아홉은 으례 따르는 풍경이지만보경사의 그것은 유난스럽다.길을 따라 좁게 길게 이어져 일주문의 턱밑까지 닿아 있는 모습이 그렇고  겨울 한철을 빼곤 언제나 소란스럽게 복닥거리는 광경 또한 그러하다.산사에 썩 어울리는 모양새가 아님은 분명하지만  거기에 우리네 삶의 악착스럽되 쓸쓸하기도 한 내면이 비쳐져 선뜻 외면하거나 타매할 염도 일지 않는다.상가가 끝나는 곳에서 몇 걸음 앞이 일주문,여기서 길지 않은 거리를 부드럽게 돌아들면 이내 천왕문에 닿는다.그 안쪽으로 보경사의 여러 전각과 당우들이 펼쳐지지만 건물의 구성이나 배치에서 별다른 특색을 보여주지는 않는다.천왕문.오층석탑.적광전 그리고 대웅전이 남북 일직선상에 놓이고 그 좌우로 몇 채의 승방과 요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대웅전 뒤로 팔상전을 비롯한 작은 전각들과 원진국사비각이 들어선 영역이 펼쳐진다.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그만그만한 자태로 평범하게 늘어서 있을 따름이다.따라서 보경사에 들어선 우리의 눈길은 자연 건물에 부수적으로 베풀어진 몇몇 '소품'들과 지정문화재로 향하게 마련이다.


굳이 꼽자면 맞배지붕 아닌 팔작지붕이라는 점 정도가 특색에 들 천왕문은 몸체에 비해 처마가 짧아 마치 양태 좁은 갓을 쓴 선비처럼 다소 볼썽 사납기조차 하지만 신방목에 조각된 사자상이 문 양쪽에 있어 잠시 발길을 멎게 한다.지금은 신방목의 존재 자체가 흔치 않기도 하거니와 거기에 음각이나 양각으로 얕게 무늬를 베푼 것이 아니라  상 전체가 드러나게 환조(丸彫)한 경우는 드물어 이 사자상은 예사롭게 보아지지 않는다.
하 오랜 세월을 지나다보니 눈.코.입은 흔적도 없고 머리조차 거의 비바람에 깎이고 닳아 어찌 보면 통통하게 살찐 토끼를 연상케 하는 이놈들은 세월이 입혀준 맑은 잿빛 살결을 드러내며 또 그세월에 잃어버린 이목구비에도 아랑곳없이 천왕문을 지키고 있다.


신방목의 사자는 적광전에도 있다.역시 좌우로 나뉘어 뒷다리를 쭈그린 채 앞다리로 버티어 앉은 두 마리 사자 또한 마모가 심하지만 천왕문의 그것보다는 한결 표정과 자태가 또렷하다.특히 왼쪽의 사자는 다섯 개의 굵은 방울이 달린 목걸이,불거진 눈,처진 귀,길게 다문 입,볼륨감 있는 몸체와 다리 등이 더욱 선명한데,사자 본연의 근엄함이나 사나움을 세월에 앗기면서 부드러워진 탓인지 담싹 보듬고 싶을 만큼 순하고 귀여운 인상의 강아지가 거의 다 되었다.


적광전의 기초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신라시대 양식이 뚜렷한 주춧돌과 고막이돌이 여전히 집을 떠받치고 있으니 보경사의 역사가 적어도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오름을 보여주는 물증이 된다.나아가 적광전의 기초는 지명스님이 절을 처음 이룩할 때 세웠다는 금당이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케 한다.양식적으로도 어긋남이 없을 뿐더러 적광전 앞의 오층석탑을 흔히 '금당탑'이라 부르는 사실과도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주춧돌이나 고막이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은 곳은 모두 비취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다.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옥돌로 다듬어진 것이다.비취빛이 은은한 옥돌로 사방을 떠받친 금당- 어쩐지 신라의 가람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보경사에서 그래도 얼마간 매력적인 공간은 대웅전 뒤편으로 전개되는 영역이다.한 단 높은 북편에서 지붕을 맞댄 채 가로로 길게 늘어진 네 채의 그저 그런 건물들,남으로 꺾이면서 동편을 막아선 명부전과 비각,앞을 가려주는 대웅전과 요사,그리고 멀찍이 물러선 서편의 담장이 이루는 공간은 심심하다.서쪽은 터져 약간 허하기도 하다.누구 막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이곳에는 관람객들의 발길도 한풀 꺾여 다소나마 차분함이 깃들여 있다.


큰 절 서쪽 계곡 건너편에 서운암이 있다.이 암자 뒷편의 대나무 사립문을 밀고 나가면 돌각담으로 막힌 부도밭이다.보경사에서 가장 '절맛'이 나는 곳이 아마도 여기이리라.큰절에서 멀찍이 떨어져 외진데다 숨은 듯 돌담장에 감싸여 알고 찾기 전에는 닿는 발길이 드물어 언제나 고즈넉하다.돌담장으로 차단된 공간은 넉넉하고 호젓하다.여기에 줄이나 간격에 얽매이지 않고 되는 대로 흩어져 있는 11점의 부도 3점의 비석은 마냥 천연덕스럽다.원진국사 부도의 영향인지 몸돌이 길쭉길쭉하다는 특색 외에는 규모나 솜씨가 대수로울 것 없는  조선 후기 부도들이지만 이들이 지어내는 분위기는 편안하고 여유롭다.이리 쏠리고 저리 기울어 조금씩은 삐딱하게 서 있는 자세가 오히려 눈을 편하게 하고 엷게 덮힌 회록색 이끼는 인위의 냄새를 지워버리며 이들을 자연의 일부로 되돌려놓았다.담장 밖으로는 길게 자란 적송.느티나무.참나무들이 성근 숲을 이루어 부도밭을 그의 품으로 거두어들인다.


유감스러운 일은 불탑의 부재들이 이들 부도와 비석의 받침돌이나 몸돌로 사용된 점이다.찬찬히 살펴보면 석탑의 지붕돌은 네 개다 찾아낼 수 있고 몸돌이 분명한 부재도 두 개는 확인할 수 있다.아무리 불교가 내리막으로 가고 있던 시절이라고 해도 남이 아닌 스스로의 손으로 불탑을 헐어 스님네의 부도를 만들었으니그 우매함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으랴.혹 그것이 망해버린 가까운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 해도 그 어리석음을 가리지는 못하리라.그러나 그도 이제는 옛일,한때 불탑의 일부로 엄연했을 돌들은 깎이고 파이고 잘린 채 지금의 처지를 묵묵히 견디며 비와 바람과 햇빛 속에서 몸을 누이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