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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개선사지 석등(開仙寺址石燈).전남 담양 본문

☆~ 풍경소리/전 남

담양 개선사지 석등(開仙寺址石燈).전남 담양

푸른새벽* 2008. 8. 4. 14:31

 

 

 

 

 

 

 

 

 

 

 

 

 

 

 

 

 

 

 

 

 

 

 

 

 

 

 

 

 

 

 

 

 

 

 

 

 

 

 

 

 

 

 

 

 

 

 

 

 

 

 

 

 

 

 

 

 

 

 

 

 

 

 

 

 

 

 

 

 

 

 

 

 

 

 

 

 

 

 

 

 

 

 

 

 

 

 

 

 

 

 

 

 

 

 

 

 

 

 

 

 

 

 

 

 

 

 

 

 

 

 

 

개선사터 석등(開仙寺址石燈)


개선사터 석등은 담양군 남면 학산리 마을에 닿기 전에 오른쪽 밭 가운데 있다.이 부근에 개선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별다른 흔적이나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이 석등의 아랫부분은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는데 1989년에서 1991년까지 복원하면서 지금의 상태로 정리되었다.간주석 위로는 비교적 원형이 남아 있고 간주석 중간 부분과 하대석,하대하석 들은 복원 당시 손질을 거쳤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각면마다 안상이 새겨진 팔각 하대하석을 놓고 그 위에 복엽(複葉) 연꽃 여덟 장을 엎어 새기고 꽃잎 끝마다 여덟 개의 귀꽃을 세운 하대석이 있다.여기까지는  복원할 때 보완된 모습으로,원래의 모습은 손상되어 명확히 밝힐 수가 없다.그 위에는 통일신라 후기 전라도 지방에서 유행한 장구 몸통 모양(鼓腹形)의 간주석이 얹혀 있으며 간주석 위에는 역시 여덟 장의 앙련을 새긴 상대석이 놓였다.다시 그 위에는 아래위에 도드라진 띠를 돌린 팔각형 화사석과 괴임이 끼여 있는데 이 또한 통일신라 후기 석등의 특징이다.


화사석은 팔각형이며 각면마다 모두 화창(火窓)이 뚫려 있다.이렇게 화사석 전면에 화창이 있는 것은 모든 부재가 한결같이 팔각형을 이루는 전형 양식에서는 볼 수 없고 고복형 간주석을 가진 석등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화창 둘레에는 모두 136자의 해서체 명문이 새겨져 있다.그 내용은 신라 경문왕과 문의왕후,그리고 공주의 발원으로 승 영판(靈判)이 석등 2기를 조성하여 함통(咸通) 9년(868)에 처음 불을 밝히고 용기(龍紀) 3년(891)에 승 입운(入雲)의 뜻으로 명문을 새겨 놓었다는 것이다.이 석등은 신라 시대 석등 가운데 유일하게 명문이 있어 제작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석등으로 비슷한 다른 석등의 연대를 추정하고 비교하는 데 표준이 된다.


지붕돌은 전각마다 귀꽃을 세우고 귀꽃과 귀꽃 사이에는 얕은 전각을 마련하여 살짝살짝 들어올렸으므로 16각형을 이루고 있다.여덟 개의 귀꽃 가운데 지금은 한 개만 남아 있다.지붕돌 위에는 상륜부가 남아 있는데 파손되어 각 부분의 형태와 문양을 식별할 수는 없다.석등의 전체 높이는 3.5m이고 보물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록 여러 군데가 손상되었지만 남아 있는 귀꽃의 문양이나 상대석 앙련에 새겨진 문양 등을 살펴볼 때 상당히 정성이 든 화려한 석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화사석의 규모에 비해 간주석 부분이 짧아서 조금 주저앉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석등은 불교의식을 할 때의 도구일 뿐 아니라 불법 광명이 시방세계에 두루 비치는 것을 상징했다.이 석등은 개선사 뜰의 연못 가운데에 있었는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밤마다 불이 밝혀져 있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개선사지석등(開仙寺址石燈)


보물 제111호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 593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최근에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시멘트로 바닥을 짠 다음 다시 세웠다.


높이 3.5m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이 새겨졌고, 사잇기둥은 장고모양이며,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8각이며 창이 8면에 뚫렸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의 끝부분에는 꽃모양을 둥글게 조각하였다.


석등의 창 사이 공간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글씨를 새긴 유일한 예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표준이 되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자료*

 

( 다음은 개선사지 석등에 새겨진 명문이 필요하다는 내게 답사까페의 주인장님이 보내주신 메일의 전문이다이곳을 빌어 답사까페의 주인장인 선과님께 감사의 뜻 전한다.)

 

신라토지문서 개선사 석등기(開仙寺石燈記)/ 구문회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가면 '개선사석등(開仙寺石燈)'이 있다. 가까이 무등산을 바라보며 한적한 시골에 홀로 서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절로 자아낸다. 개선사라는 명칭이 여타 자료에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석등의 명칭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또 석등의 소재지에 과연 개선사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916년에 총독부가 간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4권 및 {조선고적도보해설(朝鮮古蹟圖譜解說)} 4권에서 '폐개선사석등(廢開仙寺石燈)'으로 불리운 이후 그렇게 일반에 알려진 듯하다.

개선사 석등에는 비록 단편적인 금석문 자료이지만, 891년(眞聖王 5년)의 토지매매사례가 새겨진 명문(銘文 ; 이하 석등기라 함)이 있어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사적토지소유(私的土地所有)와 관련하여 '전권(田券)'즉 일종의 토지매매문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각 행의 판독순서가 확정되지 않아 내용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석등기의 각 행과 두 줄로 새겨진 세주(細註)를 모두 왼쪽[左]에서 오른쪽[右]으로 읽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된 이후, 그 판독과 내용파악은 일단락 되었다. 석등기는 약 3.5미터 높이인 석등의 팔각형 화사(火舍) 가운데 서-남-동에 걸치는 5개의 화창석(火窓石) 기둥에 두 줄씩 음각 되어 있다. 이제까지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석등기의 전문과 해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景文大王主
② 文懿皇后主 大娘主 願燈立
③ 炷 唐 咸通九年 戊子 中春 夕
④ 繼月光 前國子監卿 沙干 金
⑤ 中庸 送上 油粮業租 三百碩
⑥ 僧靈□ 建立石燈
⑦ 龍紀三年 辛亥 十月日 僧入雲 京租
⑧ 一百碩 (烏)乎比所里 公書俊休 二人
⑨ 常買 其分 石保坪 大業 渚畓四結 (五)/畦
⑩ 東令行土北同/土南池宅土西川 奧畓十結 (八)東令行土西北同/畦上南池宅土

경문대왕님과 문의황후님(憲安王의 맏딸인 寧花夫人),
큰 따님(眞聖王)이 등(燈)에 심지 세우기를 원하셨다.


(이에) 당(唐) 함통(咸通) 9년(868년, 경문왕 8년) 무자(戊子) 중춘(仲春, 음력 2월) 저녁에 달빛을 이었다.
전 국자감경(당시 國學의 異稱이거나 그와 성격이 유사한 인재양성기관의 책임자)인 사간(17관등중 8번째 관등) 김중용(金中庸)이 유량업조(油粮業租 : 직역하면 석등을 밝힐 기름을 공급하는 데 쓰이는 조이지만, 여기서는 석등 건립비용으로 보아야 함) 삼백석을 보내어 바쳤다. 승 영□가 석등을 건립하였다.

용기(龍紀) 3년(大順2년의 착오, 891년, 眞聖王 5년) 신해(辛亥) 10월 일에 승 입운이 경조(京租 : 당시 서울인 경주로 보내야 할 곡식) 일백석으로 오호비소리(烏乎比所里)의 공서와 준휴 2인에게 상매(常買 : 영구히 산다는 강조의 의미)한다.

(상매한) 그 분(分 : 매매토지를 가리킴)은 석보평 대업(大業)의 저답(渚畓 : 하천에 가까운 논) 4결 (논은 5뙈기), 동쪽은 영행의 토지이고 북쪽도 같은 토지이다. 남쪽은 지택의 토지이고 서쪽은 하천이다 과 오답(奧畓 : 하천가에서 멀리 떨어진 논) 10결 (논 8뙈기), 동쪽은 영행의 토지이고 서쪽과 북쪽도 같다. 남쪽은 지택의 토지이다.

위 석등기의 내용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1행 1자(景)∼3행 1자(炷)인데, 석등의 건립동기가 나타나있다.

둘째 단락은 3행 2자(唐)∼6행(石燈)인데, 석등건립일자, 경비(經費)와 그 기진자, 건립 책임자(建立責任者) 등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 단락은 7행 1자(龍)∼10행(池宅土)인데, 토지매매와 관련된 사항 즉 매매일자, 산 사람[買入者], 매입경비(買入經費), 판 사람[賣土者, 前所有主]의 거주지와 이름, 매입지(買入地)의 위치·지목(地目)·면적(面積)·경계(境界) 등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토지매매와 관련된 사항은 고려·조선의 토지매매문서의 양식과 공통되는 것이 많다.

석등기에는 다른 시기의 두 가지 내용 즉 868년(경문왕 8년)의 석등건립과 891년(眞聖王 5년)의 토지매매에 관한 것이 기록되어 있지만, 새겨진 시기는 모두 891년이다. 즉 891년 토지를 매입한 지 얼마 안된 시점에 일괄하여 새겨진 것이다. 명기된 두 곳의 지명(烏乎比所里와 石保坪)의 위치 비정 결과, 토지 매매는 왕경 또는 소경(小京)에 거주하는 '부재지주(不在地主)'와 개선사(의 승려) 간에 이루어졌고, 그 토지는 석등과 인접한 지역에 소재하였다. 다시 말하면 석등기에는 당시 석등이 위치한 인근 지역의 토지보유양상(土地保有樣相)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신라(新羅) 하대(下代)에는 전장(田莊)이 확대되는데, 이는 바로 대토지소유 확대의 한 경향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석등기를 통해 개선사도 마찬가지로 그 소유지를 확대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개선사는 일정 수준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을 것이다. 이는 경제적 기반의 확대를 통해 안정된 사원 경영과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석등기의 토지매매사례는 바로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 토지매매의 거래조건을 고찰함으로써 9세기 후반 신라 지방사회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경조(京租) 100석으로 저답(渚畓) 4결과 오답(奧畓) 10결 등 답(畓) 14결을 상매(常買)한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그것은 곡물(현물)과 토지의 교환으로 이루어졌는데, 토지 1결당 교환비율로 환산하면 100÷14≒7.15석이 된다. 오늘날 통용되는 화폐가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현물 특히 곡물이 중요한 교환매개물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가격이 화폐단위로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매입토지의 거래조건에 대해서는 먼저 같은 시기의 토지생산성 즉 토지 1결당 생산량 및 다른 매매사례들과 대비하여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토지와 현물의 교환비율에 대한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환대상인 토지의 생산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에 의해 거래 당사자 간에 적정수준의 교환비율이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1결당 생산량(生産量)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 비교대상으로서 고려 전기의 사례({고려사(高麗史)} 권78 志32 食貨1 租稅 成宗11년 公田 조세 수취기사)를 참고할 수 밖에 없다.

앞서 보았듯이 석등기의 교환비율은 1결당 약 7.15석이다. 단순히 단위의 절대수치가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고려사} 기사의 본문 내용에서 하등수전(下等水田)의 1결당 생산량인 7석과 거의 같다. 그런데 고려전기 사례는 미(米)를 기준으로 했으므로, 이를 조(租 : 벼)로 환산하면 하등수전의 1결당 생산량은 14石(7석x2)이 된다.

따라서 신라통일기와 고려초기 수량단위의 절대수치 차이를 무시하더라도, 석등기의 경우 교환비율은 고려전기 1결당 생산량의 1/2 수준이 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토지의 교환비율은 상식적으로 1년치 생산량보다는 높게 정해지므로, 석등기의 경우 교환비율이 적정수준보다 매우 낮게 정해졌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석등기의 사례는 통상적인 매매행위일 수 없다.

다음으로 다른 매매사례를 통해 당시 토지와 현물의 교환비율을 추정하여 석등기의 거래조건과 대비해보자. 이와 관련하여 [숭복사비(崇福寺碑 : 896년 진성왕 10년 최치원 지음)]의 8세기초에 이루어진 왕실의 토지매매사례가 주목된다. 원성왕릉(元聖王陵 : 원성왕은 799년 사망)을 조성하기 위해 그 부근의 야산 100결을 구입하고, 그 비용으로 벼 2,000석[섬]을 주었다는 것이다(교환비율은 1결당 20石).

물론 석등기의 토지매매시기와 약 90년 차이가 나고 또 그 지목(地目)이 야산이라는 점에서 석등기와 직접 대비하기는 곤란하다. 일단 숭복사비의 사례와 석등기의 사례를 동일한 지목이라고 단순 가정하여 양자의 교환비율을 대비해보자. 숭복사비의 교환비율은 1결당 20석이고, 석등기의 교환비율은 1결당 약 7.15석이다. 석등기의 논에 대한 교환비율은 숭복사비의 야산에 대한 교환비율에 비하여 약 1/3의 수준에 불과하다.

여기에 여러 변수들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목(地目)의 차이와 매매의 성격을 고려할 때, 두 변수 모두 석등기의 교환비율이 적정수준보다 헐값임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석등기의 경우와 같이 논을 매입하는 거래조건이 숭복사비의 경우와 같이 야산을 매입하는 그것보다 매우 낮다는 것은, 시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석등기의 토지매매가 통상적인 거래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석등기의 토지매매가 어떤 요인으로 인해 통상적으로 거래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무주지역(오늘날 광주광역시 일원)의 동향과 연관지어 고찰하면,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

9세기 후반 신라 지방사회는 신라국가의 집권력이 약화되어가면서 당연히 예측할 수 없는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양상은 각 지방사회가 처한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조건들은 당시에 갑자기 돌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고찰은 먼저 당시 지방사회의 구체적인 실상에 대한 파악이 전제되어야 한다. 석등기의 토지매매사례는 당시 지방사회의 상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석등건립이 국왕에 의해 발원되었고 그 경비가 왕실과 가까운 관계인 김중용에 의해 부담되었다는 점에서 개선사는 적어도 868년 당시 중앙·왕실과 교통하고 있었다.
이후 9세기 말에 이르면 당시 무주지역에는 중앙·왕실과의 관계에 국한하여 볼 때 상호 모순되는 상황이 병존하고 있었다. 석등기에 명기된 경조(京租)는 바로 토지를 매매하는 시점에 즈음하여 기진되어 나올 수 있었던 표현인 동시에 지방에 대한 중앙의 상대적인 개념(실체의 인정)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경조가 왕경으로 운반되지 않고 지방사원의 토지매매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신라국가의 통제력 약화와 곧바로 연결된다. 이러한 상호 모순되는 상황의 연출은 당면한 현실과 사람들의 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현상에서 말미암는다.

물론 이는 과도기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석등기의 연호착오를 보면 891년 토지매매 당시에 석등이 위치한 지역에서는 신라국가의 집권력이 약화되면서 왕경과의 교통이 끊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 지역과 왕경이 서로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단지 그것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중앙의 지방통제력이 이완되면서 귀족들이 그 지역에 있는 경제기반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는 데에도 많은 제약을 주었을 것이다.

토지를 판 공서와 준휴는 개선사 주변지역에 소재한 자신들의 토지 관리가 어렵게 되자, 그것을 개선사에 헐값으로 넘겼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사실상 매매형식을 빈 기진행위로서 해인사(海印寺)가 9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토지 및 전장을 매입할 수 있었던 상황과 유사하다. 따라서 석등기에는 9세기 후반 무주치소(武州治所 : 武州 都督이 상주하는 州의 중심지)의 인근지역이 처해있던 상황이 토지매매형태로 투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