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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소쇄원 돌아보기.전남 담양 본문
소쇄원...
뻔질나게는 아니더라도 담양을 찾을 기회가 있을때 마다 돌아보면서
그 유명세를 치르는 이름값을 왠만큼은 느꼈었기에
나의 이번 담양 답사여행에서 소쇄원은 그리 앞선 관심처는 아니었다
서너 번쯤 돌아 본 소쇄원보다는 아직 발길이 닿지 않은 곳, 찾아 봐야 할 곳이 더 많았었기에
그런 곳을 한 곳이라도 더 돌아볼 요량이었지만
소쇄원은 담양을 처음 찾은 자민이의 관심이 대단한 곳인지라
담양의 마지막 답사처로 소쇄원을 돌아 보았다
비는 그 줄기가 한층 가늘어져 있었지만 하늘은 꺼먼 색깔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소쇄원은
중종 때 사람인 양산보(1503~1557)의 별서정원(別墅庭苑)이다
별서란 살림집에서 떨어져 산수가 좋은 곳에 마련된 주거공간을 말하며
이곳에 정자와 더불어 조성되는 정원을 별서정원이라 한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30대부터 짓기 시작하여 40대에 완성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 면앙정을 지었던 송순과 함께 김인후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양산보는 소년 시절에 마을 뒤의 계곡에서 놀다가
물오리를 따라서 지금 소쇄원이 있는 곳까지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때 언젠가는 이곳에 집을 짓고 살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소쇄(瀟灑)'라는 말은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온 말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한다
양산보는 그 뜻을 따서 정원의 이름을 붙이고 그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기의 호를 소쇄옹이라 했다
소쇄원은 찻길을 벗어나며 바로 이어지는 대밭에서부터 시작된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울퉁불퉁한 자갈 섞인 흙길이었던 소쇄원 초입이
이젠 이렇게 붉은황토색을 흉내낸 근사한(?) 포장길로 바뀌었다
대숲은
들어가는 길 좌우로 빽빽이 이어지며 늘상 서늘한 바람을 일구어 내지만
지금은 대나무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 서늘한 바람은 어디에 있을까...
대숲이 끝나가면 앞쪽으로 담장과 대봉대가 보인다
딴 세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봉대(待鳳臺)는 봉황을 기다리는 곳
봉황처럼 소중한 손을 기다려 맞는다는 다정한 뜻이 담긴 곳이다
이름에 걸맞게 예전에는 곁에 오동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고목이 되어 없어졌다
대봉대 아래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고 입구 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조금 더 큰 연못이 있다
나무 속을 파낸 홈대와 도랑을 타고 온 계곡물은 먼저 작은 못을 채우고
그 물이 넘치면 다시 도랑을 따라 큰 못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다
큰 못에서도 넘쳐난 물은 돌로 만든 수구를 통해 계곡으로 떨어진다
영조 31년(1755)에 만들어진 「소쇄원도」 목판에는
두 못에 물고기가 놀고 못가에 물풀이 자란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봉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동쪽 담에는
애양단(愛陽壇)이라고 새겨진 판이 박혀 있다
이 부근은 유난히 볕이 바르다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의 아름다움 48가지를 노래한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 가운데
'애양단의 겨울낮(愛陽冬午)'에서
한겨울에 계곡은 아직 얼었는데 이곳의 눈은 모두 녹았다고 노래 했다
애양단을 지나면서 담은 ㄱ 자로 꺾인다
그 담에 또 오곡문(五曲門)이라 새긴 판이 박혀 있다
그 옆에는 담 밑에 구멍이 뚫려서 그리로 물이 흘러들도록 되어 있다
돌을 섞어 흙담을 쌓고 기와를 얹으며 죽 이어 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넓적한 바위를 걸쳐 다리를 놓은 후 그 위에 담을 올린 것이다
오곡문이란
담 아래 터진 구멍으로 흘러든 물이 암반 위에서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수구 옆에 일각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냥 트여 있다
소쇄원에 올 때마다 이 곳엔 항시 발을 담그고 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에도 아이들과 함께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사진을 찍으려
잠시 양해를 구했다
다리를 건너면 두 단으로 된 꽃계단(花階)을 만난다
이 같은 단은 보통 비탈의 침식을 막을 겸 쌓아서 바라보고 즐길 수 있도록 꽃나무를 심어 꾸미는데
소쇄원에서는 여기에 매화를 심고 매대(梅臺)라 불렀다
매대 뒤의 담에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라는
송시열 글씨의 글자판이 박혀 있다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 이라는 뜻의 제월당(霽月堂)은
이곳 주인의 사생활적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왼쪽에 치우쳐서 한 칸 방이 있고
나머지 두 칸은 마루로 트여 있으며 마루 뒷벽에 활짝 열 수 있는 문이 달려 있으며
볕이 잘드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며 제법 넓은 앞마당과 화단을 갖추고 있다
제월당 마루에 앉아 내다보면 시선이 광풍각 지붕너머로 쭉 뻗는다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는 공간을 나누어 주는 얕은 담과 작은 문이 있다
제월당이 주인의 사생활적 공간이라면 광풍각(光風閣)은 사랑방 격으로
소쇄원의 풍광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중심 공간이다
광풍각에서는 주로 물의 흐름과 폭포,바위에 부딪는 물방울,
맞은 편에 있던 물레방아의 정취와 물소리 등 수경을 즐기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광풍각의 처음 이름은 침계문방(枕溪文房) 또는 계당(溪堂)이었다 한다
'비온뒤에 해가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광풍각(光風閣)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인데 가운데 한 칸에 방을 들였고 빙 둘러 가며 마루를 깔았다
불을 넣는 아궁이가 뒤편에 있어서 그곳 마루가 다른 것보다 한 단 높게 달려 있는 점이 색달라 보인다
물론 방문은 여름에는 모두 들어 열도록 되어 있다
소쇄원은 이 후로도 오랫동안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다
사시사철 이렇게 사람들이 비벼대고 있으니...
요즘 광풍각 방 뒷벽에 「소쇄원도」목판을 복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요모조모 뜯어 보며 지금의 모습에 예전의 모습을 겹쳐 보는 것도 재미있다
1755년에 제작된 「소쇄원도」목판 복사본
소쇄원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있게 할 뿐더러 조선 시대 정원을 연구하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된다
제월당과 광풍각의 현판 글씨는 이 지역 대부분의 현판 글씨와 마찬가지로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우암 할배 도무지 안 간데가 없고 담양 어디든 글씨 없는 곳이 없네~ 힘도 좋으시지~ㅎ)
양산보는 도연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승 조광조를 따라서 주돈이를 존경했다
제월당이니 광풍각이니 하는 이름도 송나라 사람 황정견이 주돈이의 사람됨을 가리켜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뒤 볕이 나며 부는 바람과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 같다"(胸懷灑落 如光風霽月)고 한데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는 고경명,김인후,송순,정철,김성원,기대승,백광훈,송시열 등
당대의 이름있는 문인,선비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이 남긴 여러 시문 가운데 고경명의 「유서석록(遊瑞石錄)」과 앞에서 나온
김인후의 「소쇄원사십팔영」에 소쇄원의 옛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소쇄원 안의 바위 하나,물굽이 하나에도 따로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주는 감흥을 만끽했다
소쇄원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살리면서 꼭 필요한 부분에 적절하게 인공을 가하였다고들 말한다
그 안에 들어가 이곳 저곳을 더듬다 보면
함부로 손대는 것을 아꼈을 뿐이지 어디 한 군데도 배려하지 않은 구석은 없음을 느끼게 된다
계곡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서 자연 경관을 고루 경험하도록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
적당히 걷다가 멈출 만한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눈 줄 곳,
또 앉을 곳 등 모든 것이 세심하고 철처하게 배려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란
엉성한 자연 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완벽한 배려와 애정 속에서 인공을 가함으로써 오는
자연과의 동화일 것이다
양산보는 자기의 마음이 샅샅이 닿은 이 정원을 매우 아껴서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 것이며
하나라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도 말라" 고 유언했다
그 덕에 오늘날 우리는 이 조선 시대 민간 정원의 백미를 비교적 원형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소쇄원은 2008년 5월에 명승 제40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소쇄원을 끝으로 나의 담양답사를 마무리했다
아직도 담양은 찾아 볼 곳이 많은 고장이다
금성산성.관방제림.분향리석불입상.언곡사지삼층석탑.연동사지삼층석탑.천변리석인상 등...
폭염주의보가 내린 여름날의 답사는 말 그대로 고행에 다름아니었다
줄줄 연신 흘러내리는 땀과 더위로 따끔거리는 얼굴을 연신 두드리며
세찬 소나기 속에 사진기 물에 젖을 까봐 세세한 사진은 고사하고
차근차근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했으니...
하기는 아쉬움이 있어야 또 찾을 것이라며 미진한 맘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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