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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선원사지(江華仙源寺址).인천광역시 강화군 본문

☆~ 절집.절터/인천광역시

강화 선원사지(江華仙源寺址).인천광역시 강화군

푸른새벽* 2008. 12. 13. 17:21

 

 





 









 





 





 





 





 





 

 









 

 





 









 





 

 









 





 

 





 









 

 





 









 





 





 

 





 

강화 선원사지(江華仙源寺址)

 

사적 제 259 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산133


지금은 선원면 지산리 691-1 번지로 축소되어 있지만 고려시대 당신에는 현재 선원 면사무소가 위치하는 마을 전체가 선원사였다.현재의 대문리는 선원사 대문이 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구전되니 절터가 상상외로 넓었음을 뜻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선원사의 옛터는 강화읍의 남쪽 8리에 있는데 지금은 장원서(掌苑署)의 과수원이 되어 있다"고 기록하고『강화부지(江華府誌)』는"선원사의 禪을 仙으로 고쳐 仙源理로 하였다"고 적고 있다.이로써 지금의 선원면 일대가 모두 선원사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강도시대 최고의 국찰이었던 만큼 그 규모는 당연히 상당했을 것이다.


선원사는 고려가 몽고의 난을 피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이후 당시의 최고 권력자 최우가 고종 32년(1245)에 창건한 절이다.대몽항쟁을 위한 민심 단결의 원찰이었고 순천 송광사와 함께 고려 2대 선찰로 명성을 날린 절이었다.역대 주지에 진명국사.원오국사.자오국사.원명국사.광연선사 등 신망 두터운 당대의 국사.고승을 임명한 사실만 보아도 선원사의 역할과 중요성이 짐작되는 바다.몽고족의 침입으로 전국의 폐해가 날로 심한 그때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부처의 힘에 의지하며 대장경 판각사업을 강도에서 해내고 있었음에랴.


어느 정도 규모였고 어떤 절차와 방법이었는지 딱히 어느 장소였는지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는 상태에서 선원사는 고려대장경 주조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조선왕조실록』에 "조선 태조 7년(1398)에 대장경판을 서울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렇다면 강화도 전역에서 그 많은 대장경판을 조선 초까지 100여 년간이나 보관했을 만한 사찰이 어디였을까.설사 판각장소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강화에서 대장경을 보관할 만한 사찰은 선원사말고는 없었다.


대장도감(大藏都監)의 본사(本司)가 강화도에 있었다고 전한다.경판을 필사하고 교정.감독하는 일은 지식 있는 승려가 아니고는 해낼 수 없다.
선원사의 역대 주지가 국사(國師)와 신망 있는 고승 대덕이었던 점은 바로 이곳에 대장도감 본사가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그와 같은 선원사의 규모나 입지 조건,당시 갖추고 있던 대장경판 간행사업을 추진하기에 매우 적절한 곳이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한편 대장경 분사도감이 있었다는 '남해'라는 지명은 오늘날의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관당들 일대로 추측하고 있다.이 지역은 90년 전 바다였던 것을 매립해 농토로 만들었음이 밝혀졌으며 최근까지 이 일대의 지하에서 발견된 통나무.기와조각 등으로 이곳에 분사도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학술조사단에 의해 조사된 선원사는 당시 보상화문이 새겨진 전돌,막새기와, '옴마니반메훔'의 범자(梵字)가 새겨진 치미 등의 조각들이 출토되었다.500불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조선 태조 7년에 폐사가 되었다


선원사의 중심지역은 현재 남북으로 250m,동서의 폭이 170m 정도 된다.1977년에 사적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