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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전남 강진 본문

☆~ 풍경소리/전 남

강진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전남 강진

푸른새벽* 2009. 2. 20. 11:43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선각대사(법명은 형미逈微)의 부도비이며 보물 제 507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신과 비신을 받친 거북,비신머리가 모두 온전하다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인데 정수리에 뿔이 있고 귀 뒤에는 작은 깃이 달렸다
코가 벌름하고 윗입술은 조금 말려 올라갔는데
여의주를 문 입에 가지런한 아래 윗니와 혀가 보이는 것이 독특하다
두 눈은 치켜 올라갔고 눈썹이 솔처럼 빳빳하게 솟았으며 턱 밑에 갠질갠질한 수염이 달렸다
깊숙이 내려온 등껍질에는 육각 무늬가 얕게 새겨졌고 목 아랫부분에 배딱지가 표현되어 있다


거북 등 가운데 마련된 비신받침 앞뒤에는 구름무늬가,양옆에는 안상이 새겨졌다
비신에는 '고려국 고무위갑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명'이라는 제목 아래
최언휘가 짓고 유훈률이 쓴 비문이 앞면에만 새겨져 있다
비신머리는 두 개의 돌을 포개어 만들었고 운룡문과 쌍룡문으로 장식되었다


선각대사 형미(先覺大師逈微)는
신라 경문왕 4년(864)에 나서 경명왕 1년(917)에 죽었다
광주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였다
15세에 출가하여 가지산 보림사에서 가지산문을 연 보조선사 체징의 제자가 되었다
28세 되던 해에 조공하러 가는 사신을 따라 당으로 건너가 운거 도응(雲居 道應)의 법을 받고
효공왕 9년(905),45세로 귀국했다
이때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태봉을 세워 몰락해 가는 신라와 함께 후삼국 시대를 열던 무렵이었다


형미는 궁예의 수군 담당 부하였던 왕건의 청을 받아 무위갑사로 와서 머물렀는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무위갑사에서 8년을 머물던 형미는 왕건을 따라 태봉국의 수도였던 철원으로 갔다
그러나 왕건을 의심하여 죽이려던 궁예에 맞서 왕건을 두둔하다가 자기가 죽음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1년(917) 그의 나이 54세 때였다


왕건은 고려를 연후 형미에게 선각대사라는 시호와 편광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그가 죽은 지 28년이 지난 정종 원년(946)에 무위사에 그의 부도비가 세워졌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보물 제507호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의 월출산 동남쪽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의 명승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하였고, 명종 5년(1550) 태감(太甘)이 4번째로 세우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선각대사편광영탑과 나란히 서있는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