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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강진 사문안석조상(康津 寺門안石彫像)=토동 입석상.전남 강진 본문

☆~ 풍경소리/전 남

강진 사문안석조상(康津 寺門안石彫像)=토동 입석상.전남 강진

푸른새벽* 2009. 2. 20. 11:50

 

 

 

 

 

 

 

 

 

 

 

 강진사문안석조상(康津寺門안石彫像)=토동 입석상


월남사터 입구 건너편 길로 들어서서 월남저수지를 지나 잠시 들어가면 왼쪽 언덕바지에 작천면 갈동리 2구 토동마을이 붙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퇴동이라고도 발음한다.1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당산의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는 가지를 믿음직하게 뻗고 있다.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 이 나무 아래에 촛불을 켜고 술과 과일,돼지머리를 차려 놓고 당산제를 지낸다.


평소 마을의 공동작업 마당이나 휴식공간으로 쓰이는 당산나무 아래에는 널따란 반석들이 깔려 있고 모정이 있는데,그 옆에 특이한 입석상 하나가 눈길을 끈다.지름 1.5m쯤 되는 편편하고 둥근 대좌  가운데에 아래보다 위가 조금 더 굵은 돌기둥이 선 모습이다.기둥은 높이 1.2m가량으로 비석 모양이지만 반듯하지는 않고,특히 윗부분은 거의 울퉁불퉁한 자연석 그대로이다.


둥근 대좌는 연잎 무늬가 새겨진 채 세 조각으로 갈라져 있다.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해방 전에도 지금과 같은 상태였다고 한다.입석에는 앞면에 4구 등 돌아가며 모두 13구의 상이 새겨져 있는데 주로 입상이고 좌상이 한 구 있으며 머리만 새겨진 것,상체만 새겨진 것고있다.남아 있는 그림꼴로 보아 뒤쪽의 상당 부분이 깨어져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앞부분의 두 입상 가운데 조금 위에 새겨진 것은 머리에 뿔이 나고 이마와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눈은 치켜 올라갔다.뾰족한 송곳니가 입가에 보인다.오른손에는 방망이를 들었고 왼손은 옆으로 내렸는데 손가락이 4개뿐이다.윗도리는 벗은 듯하고 배 부분의 U자 무늬는 옷주름이라기보다 배 근육을 표현한 것 같다.주름이 많이 진 헐렁한 바지를 입고 버선처럼 코가 나온 신을 신었으며 왼쪽 다리를 살짝 구부리고 오른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있다.그 옆에 있는 입상도 윗도리를 벗고 헐렁한 바지를 입은 모습인데 허리띠를 둘렀다.오른손을 가슴에,왼손을 허리께에 두고 있으며 역시 버선 같은 신을 신었다.


이들의 모습은 불교적인 분위기보다는 도깨비에 가깝다.뿔이나 험상궂은 얼굴,방망이 등은 도깨비의 상징이며,다리의 모습에서도 도깨비는 왼쪽 다리가 약하다는 통념이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옆부분에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아예 왼쪽다리를 구부려서 오른쪽 다리에 붙인 모습의 입상도 있다.


그러나 다른 상들에서는 조금씩 불교적인 색채가 엿보이고 특히 좌상은 불상이나 참선하는 수행자상처럼 보인다.또 앞부분 위쪽에는 가릉빈가를 표현한 듯한 새의 모습도 있다.대좌에 연잎무늬가 새겨진 것과 더불어 볼 때,이 입석상은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도깨비 신앙이 불교와 습합된 사례로 볼 수 있을 듯하다.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입석상은 원래 토동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찻길 부그느에 있었는데 해방되기 2~3년 전에 월남리 사람들이 가져간 것을 해방 직전에 되찾아와서 이곳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토동 사람들은 마을 앞을 '사문(寺門)안골'이라 부른다.이곳이 월남사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인지,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강진사문안석조상(康津寺門안石彫像)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7호 
전남 강진군 작천면 갈동리 면동마을 


면동마을 길가에 자리하고 있는 높이 122㎝의 석상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큼지막한 둥근받침 위로 4각의 석상이 놓여 있는 모습이다. 둥근받침은 네 조각의 돌이 이어 있으며 가운데가 4각으로 파여 그 곳에 석상을 고정시켜 놓았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석상은 앞면과 양 옆면을 약간 다듬었을 뿐 뒷면은 자연석 그대로이다. 받침은 윗면에 8판의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석상에는 앞과 옆면에 13개의 다양한 상들을 조각하였다. 머리에 뿔이 있거나, 강하게 부각시킨 이목구비, 방망이를 든 도깨비 등 주로 도깨비 얼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악귀를 물리치는 얼굴 형상이다.


원래 사문안이라는 마을 앞 야산에 있던 것을 194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것으로, 사문안은 사찰지역이라는 의미이다. 석상의 기능이 불교적 요소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되며 또한 도깨비에 대한 민간신앙 요소와도 복합되어 있어 두 문화의 결합을 보이는 흥미로운 유형물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