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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전남 장흥 본문

☆~ 풍경소리/전 남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전남 장흥

푸른새벽* 2009. 4. 16. 12:06

 

 

 

 

 

 

 

 

 

 

 

 

 

 

 

 

 

 

 

 

 

 

 


보림사 보조선사부도(寶林寺 普照禪師浮屠)


가지산문을 개산한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이다
보조선사가 입적한 후, 앞에 있는 부도비와 함께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졌다
높이 4.1m의 팔각원당형 부도이며 보물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각 지대석 윗면에 아주 얕은 각형 굄을 한 단 새긴 후, 그 위에 상.중.하대석과 몸돌,
지붕돌과 상륜부가 차례로 세워졌다
하대석은 두 단으로 이루어졌는데,원래는 모두 팔각이었겠지만 지금은 파손이 심한 상태이다
누군가가 돌의 결을 따라 정질을 해서 조각상을 따내 간 흔적이 보이며,
군데군데 남은 부분을 보면 아랫단에는 각 면에 안상이,
윗단에는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대석 위에는 중대석을 받기 위한 굄을 따로 해 넣었다
형태는 둥글며 측면에 구름무늬를 뭉실뭉실하게 새겨 놓았다
이 굄돌 윗면에는 다시 팔각 굄단이 3단 있지만 구름무늬가 위쪽까지 솟구쳐 있어서 잘 안 보인다


중대석은 팔각이며 배가 약간 부른 형태이다
각 면에는 네모꼴에 가까운 특이한 안상을 두 겹으로 새겼고
안상 아래위로는 두 줄씩 띠를 둘러 놓았는데
그 띠를 따라 팔각의 모서리와 중간에 자그마한 꽃무늬가 하나씩 새겨져 있다
상대석은 맨 아랫면에 2단 받침을 둔 후 앙련을 새겼고 그 위에 따로 몸돌 괴임대가 있다
앙련은
모서리마다 단엽 1판 연꽃잎을 조각하고 꽃잎 뒷면에 고사리 무늬와 곡석 무늬를 장식한 모양이다
몸돌 굄대는 팔각으로 높직한데 중간에 가느다란 가로선이 한 줄 돋아 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중대석에 배흘림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몸돌 굄대도 가로선이 지나가는 중간 부분이 조금 볼록하다


몸돌은 유난히 크고 넓다
팔각의 각 면마다 우주가 조각되었고
윗부분에는 기둥머리가 새겨져서 목조 건물의 짜임을 본뜨고 있다
몸돌 8면의 앞뒤에는 문이,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었다
문 안에는 자물쇠와 문고리 두 개가 새겨져 있는데,자물쇠에 도깨비 얼굴이 양각되었고
문고리는 그냥 동그랗지 않고 가운데가 잘록한 오뚝이 모양을 하고 있다
문 위쪽에도 꽃무늬 장식이 있다
화려한 갑주를 입은 사천왕상에서는
굽이쳐 휘날리는 옷자락과 매듭 등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이 돋보인다


다른 부분의 섬세함에 비해 지붕돌은 매우 무뚝뚝하게 생겼다
낙수면은 급하게 흘러내렸고 팔각 지붕골이 만나는 곳에는 굵직한 마루가 표현되었으며
그 사이에 기왓골이 새겨졌다
아래쪽에는 팔각 받침 두 단과 서까래가 새겨졌고 처마에는 굵은 구름무늬가 있다
추녀는 수평으로 두툼한데 막새기와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모서리마다 귀꽃이 있다
지붕돌 윗면에는 상륜을 받기 위한 팔각 굄이 두 단 있다
상륜부에는 복발과 보륜,보주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복발은 둥글며 측면에 여덟 모서리를 따라 꽃무늬가 있고 이 무늬들을 연결하는 가로 띠가 있다
그 위에 마디가 있는 간주가 세워졌고 그 중간마디에 구름무늬를 장식한 보륜이 놓였다
보주는 연꽃봉오리 모양이며 작은 앙련대 위에 올려져 있다


쌍봉사,태안사,실상사,연곡사 등 선종의 전통을 지닌 전라남도 일대의 절에는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뛰어난 부도들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보조선사 부도은 일제 때 도굴꾼이 사리장치를 훔쳐 가려고 무너뜨린 것을
다시 세우느라 군데군데 손상을 입긴 했지만
듬지간 무게와 각 부분의 섬세함을 함께 지닌 멋있는 부도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


보물 제157호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1 


보림사에 세워져 있는 사리탑으로, 보조선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보조선사(804∼880)는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 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탑은 바닥돌부터 지붕돌까지 모두 8각으로, 통일신라 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의 아래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하였고,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로 띠를 두른 약간 배가 부른 모습이다. 8개의 큰 연꽃조각 위에 놓여진 탑신의 몸돌은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그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겼다. 두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서까래를 표현해 놓았고, 윗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파여져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완전한 모양은 아니지만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주(寶珠)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탑신의 몸돌이 지붕돌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지붕돌의 질감이 달라서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다. 일제시대 때 사리구를 도둑맞아 쓰러졌던 것을 복원한 바 있는데 이때 일부분이 손상되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