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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보조선사부도비(寶林寺 普照禪師浮屠碑).전남 장흥 본문

☆~ 풍경소리/전 남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부도비(寶林寺 普照禪師浮屠碑).전남 장흥

푸른새벽* 2009. 4. 17. 14:56

 

 

 

 

 

 

 

 

 

 

 

 

 

 

 

 

 

 


보림사 보조선사부도비(寶林寺 普照禪師浮屠碑)


보조선사가 입적한 지 4년 후인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부도비이다
전체 높이는 3.46M이고 돌거북과 비신,비석머리(이수)가 다 온전히 남아 있는데
9세기 말 석비 양식의 전형을 보이는 뛰어난 유물로서 보물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신을 받친 돌거북의 얼굴은 눈을 몹시 찌푸리고 눈꼬리가 위로 치켜졌으며
콧구멍 속에서 수염이 돋아나왔고 입 옆에 갈퀴가 붙어 용머리처럼 표현되었는데
아주 엄한 표정을 하고 있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었고 곧추세운 목 앞에는 가로로 비늘이 새겨졌으며
네 발에는 발가락이 4개씩 있다
등껍질에는 육각형 구갑문이 정연하게 조각되었고,등 한가운데에 높직하게 비신받침대를 마련하여
둘레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러 놓았다


비석머리는 가운데에 가지산 보조선사 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비제가 적혔고
양옆에는 뒤얽힌 용이 훌륭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를 조각한 띠를 둘렀다


비신에는 보조선사의 행장이 적혀 있는데,
비문은 김영(金潁)이 지었고 글씨는 일곱째 줄 선(禪)자까지는 김원이 해서로 쓰고
그 다음 사(師)자부터는 김언경이 행서로 썼다
이렇게 한 비문을 두 사람이 쓴 것은 아주 희귀한 일인데,
비분 앞부분에 '김영이 짓고 김원이 쓰다'라고만 하고
끝에 가서 '7행 선자 이후부터는 김언경이 쓰다'라고 적고 있다
김원이 도중에 중병에 걸렸든지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만 정학한 사정은 알 수 없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조선사는 애장왕 5년(804)에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났다
성은 김씨였고 그의 집안은 지방의 명문이었다
어려서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에게 출가했으며 흥덕왕 2년(827) 24세 때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현재 서산마애삼존불 근처에 터가 남아 있는 가야산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설산(설악산) 억성사로 가서 염거화상의 문하에서 정진하여 법인을 받았고
희강왕 2년(837)에 34세로 당나라로 건너갔다


그는 당나라 이곳저곳을 다니며 선지식을 찾았지만
염거화상을 통해 전해 받은 도의선사의 법밖에 다른 법이 없음을 깨닫고
3년 만인 문성왕 1년(840)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후 20여 년 동안 염거화상이 주석하는 억성사와 도의선사가 머물렀던 진전사
그리고 출가본사와 수제본사가 있는 고향 태안반도 일대에서 활동했고 청양 장곡사를 개창하는 등
많은 승속에게 선지를 폈다
56세인 헌안왕 3년(859)에 무주(지금의 광주)의 황학란야(黃壑蘭若)로 거처를 옮기자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이 해에 왕이 장사현 부수 김언경을 보내 선사를 왕경으로 초빙했으나
선사는 신병을 빙자하여 사양했다
그러자 왕은 다시 임금을 모시는 승려와 세속 사신들을 보내 가지산사로 옮겨가기를 청했다
가지산은 원표대덕이 예전에 머물던 곳으로,원표대덕이 법력으로 정사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경덕왕 18년(759)에 왕명으로 장생표주가 세워진 곳이다


이듬해인 헌안왕 4년(860)에 보조선사가 가지산사로 옮겨가자 김언경은 쇠 2500근을 사서
비로자나불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이때 헌안왕은 재물을 내어 공사를 돕게 했고 이듬해인 경문왕 1년(861)에는 절을 증축했다
이렇게 절의 규모가 세워진 후 보조선사는 20년 동안 주석하며
초조 도의선사에서 2조 염거화상으로 전해져 온 선지를 높여 가지산문의 기치를 뚜렷이 세우고
헌강왕 6년(880)에 입적했다
당시 그의 제자는 800여 명에 이르렀다


3년 후 제자들이 선사의 행장을 지어 부도를 세우려 하자 왕은 보조(普照)라는 시호와
창성(彰聖)이라는 탑명(부도이름)을 내리고 절의 이름을 중국 남종선의 본산인 조계산 보림사를 따서
보림사라고 지어 주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보물 제158호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1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보조선사(804∼880)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의 머리가 용머리를 하고 있어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나운 모습이며, 등 뒤에는 육각형의 무늬가 전체를 덮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장식해 놓았다. 비몸돌에는 보조선사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김영이 비문을 짓고 김원과 김언경이 글씨를 썼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웅대하게 조각하였고, 앞면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영’이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다.


통일신라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비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