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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전남 장성 본문

☆~ 풍경소리/전 남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전남 장성

푸른새벽* 2009. 4. 20. 18:09

 

 

 

 

 

 

 

 

 

 

 

 

 

 

 

 

 

 

 

 

 

 

 

 

 

 


필암서원(筆巖書院)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서원으로
호남 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鼓巖梁子徵,1523~1594)을 배향하고 있다


김인후 선생이 죽은 후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고 공부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그이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인조 2년(1624)에 김인후 선생이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다
현종 3년(1662)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서원의 입지 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으므로

현종 13년(1672)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어졌고 1786년에 양자징도 함께 모셔졌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다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뒤를 감싼 가운데 평지에 자리잡은 필암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의 공간과 교육 및 학문 수련의 공간,그밖에 장서 공간이나 지원 시설 공간 등
조선 시대 서원의 기본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서원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필암서원은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교육 공간이 앞에,제향 공간이 뒤에 놓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보인다
문루.강당.사당이 남북을 축으로 하여 차례로 서고

강당과 사당 사이에 동재와 서재가 마주 놓여 기본 구조를 이룬 후 각 부속 건물들이 적절하게 자리잡았고
각 공간과 공간은 담으로 구획되어 독립성을 가지면서도 크고 작은 문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중종 37년(1542) 백운동 서원에서 비롯된 우리 나라 서원의 건물 구성은 시대가 흐르면서 서원의 기능이 달라지는 데 따라 변화를 보인다
처음에는 교육 시설이 중시되었으나 17세기 후반 이래로는 제향 시설을 중심으로 건물이 세워졌고

그에 따라 장판각이나 장경각,누각 등도 점차 사라졌으며 19세기에 이르면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로 바뀐다
그 가운데 필암서원은 서원의 교육 기능과 제향 기능이 균형을 이루던 중간 시기에 조성되어 건물 구성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며
조선 시대 서원 공간의 꾸밈새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적지가 된다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필암서원(筆巖書院)


사적 제242호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379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년(1662)에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