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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선림원지(禪林園址).강원 양양 본문

☆~ 절집.절터/강 원

양양 선림원지(禪林園址).강원 양양

푸른새벽* 2009. 5. 1. 20:23

 

 











 






 

 











 

 






 






 






 






 











 






 

 











 

 






 











 

 











 

 











 

 

 양양 선림원터(禪林園址)


선림원터는 좁은 산비탈 높은 축대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자칫 방심하면 놓치고 말아 길을 되짚어 오게 되는 수가 많다.선림원터에 서고 보면 절터가 들어서기에는 좁게 여겨지지만 근방의 산간에서는 가장 넓은 터이다.그러나 '선림원禪林園址'이라는 이름과 깊디깊은 산속에 자리한 것으로 보아 이 절이 중생들을 위한 기도처라기보다 스님들의 수도를 위한 곳이었던 듯하여 생각해보면 그렇게 클 필요도 없었을 것 같다.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부도,석등,부도비 등 솜씨도 규모도 굵직굵직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돌봐주는 사람 없는 이 절은 804년에 순응順應법사가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월정사에 남아 있다가 한국전쟁 때 월정사와 함께 불타버린 범종이 1948년 바로 이 선림원터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범종에 804년 순응법사가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선림원터에는 이 종을 돌볼 사람이 없어 월정사로 옮겨졌는데,그만 변고를 만났던 것이다.조성 내력과 연대가 새겨져 있던 이 종은 상원사 동종,성덕대왕신종과 더불어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었다.


순응법사는 802년 해인사를 세운 인물이다.그렇다면 선림원은 의상대사가 이끌던 신라 불교 최대의 종파 화엄종에서 지은 절이며 9세기 중엽

홍각선사(절터에 남아 있는 부도비의 주인으로,선사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종의 승려이다)가 대대적인 중수를 하면서 선종 사찰로 전향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당시 화엄종 승려들이 대거 선종으로 이적한 사실을 말해주는,그 최초의 사찰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절터에 남아 있는 부도비,부도,삼층석탑,석등을 비롯해 쏟아져 나온 갖가지 기와들이 모두 9세기 후반의 것들이어서 이때 대대적으로 중수되고
홍각선사를 비롯한 선종 승려들이 이 선림원에 들어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수도에 전념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85년 동국대 발굴조사단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금당터의 주춧돌이나 그 밖의 유물이 집단적으로 온전히 매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900년을 전후한 어떤 시기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절터가 완전히 매몰되었으며 그 시대 이후의 유물이 단 한 점도 발굴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시 재건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선림원은 산록 때문에 강당을 없앤 전형적인 일탑식 가람으로 밝혀졌는데 금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 정도의 규모로서 그 주춧돌이 뚜렷이 남아 있다.한편 금당터의 서북편에 석등을 앞에 세운 조사당도 있었음이 확인됐다.조사당터의 동편에는 홍각선사의 부도가 있으며 조사당은 홍각선사의 영정을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미천계곡에서 들어오는 입구 쪽의 축대에서 승방터도 확인됐다.


선림원터의 보물급 문화재들은 삼층석탑 말고는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부도는 기단만 남아 있고 부도비의 비는 박살이 나서 150여 자만 수습되어 금석학 자료로 남아 있으며 석등의 지붕돌 귀꽃은 반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그래도 부도의 기단에는 긴장미가 뚜렷한 앙련 복련이 남아 있고 부도비의 거북이와 용은 곧 날아오를 듯 생동감이 넘치며 석등의 장구형 간석竿石(기둥돌)은 매우 화려하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