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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녹두장군 옛집(전봉준생가).전북 정읍 본문

☆~ 풍경소리/전 북

정읍 녹두장군 옛집(전봉준생가).전북 정읍

푸른새벽* 2009. 6. 18. 18:44

 

 

 

 

 

 

 

 

 

 

 

 

 

 녹두장군 옛집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이 집은 갑오농민전쟁 당시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사적 제2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모습은 원래 있던 방 1칸,부엌 1칸,광 1칸의 오막살이를 훨씬 번듯하게 복원한 것이며
집 주위에 흙담을 두르고 한옆으로는 집터만한 마당까지 내어 잔디를 심어놓았다
고부봉기가 있은 뒤에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는
동학 교인으로 지목되는 사람들의 집을 모조리 불질렀는데
1974년에 이 집을 해체.보수할 때 '戊寅二月十六日'(1818년 또는 1878년 2월 16일)이라 적힌
상량문이 나온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집은 완전히 타지 않고 일부가 남았던 모양이다


안내판에는 생가라고 씌어 있으나
전봉준은 1855년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당촌마을의 전봉준 생가터는 지금 밭이 되어 있다
양반계층에 속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락하여 몹시 가난했던 전봉준은
생계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원평.태인 등지로 떠나니며 살았고
농민전쟁 직전에는 이곳 조소마을에 살며 동학의 고부 접주로 있었다


'공맹(孔孟)의 학'을 닦던 전봉준은
유학의 가르침만으로는 세상을 구제하는 데 이미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있던 중에
'보국안민'이라는 동학당의 주의에 감동하고
'마음을 바로한 자의 일치는 간악한 관리를 없애고 보국안민의 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1890년 무렵 동학에 입도했다고 한다


그는 입도 후 포교활동을 하지는 않았고,체포된 후 심문받을 때 동학에 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동학을 대단히 좋아했다" 라고 대답했다
전봉준이 '교도로서 믿음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용무지지(用武之地)를 발견하고
동학에 들어갔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어쨌든 그의 입장은 종교적 영역에 머물려 하던 북접과는 달리 부패한 현실을 개혁하고
하루라도 빨리 무고한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자는 현실 개혁적 노선을 걷던
남접계 인물들의 입장과 같았다


다 알고 있다시피,그는 농민전쟁의 전 과정을 통해 눈부신 지도력과 조직력을 발휘했고
1894년 12월에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순창읍 피노리에서 잡힌 후 심문을 받을 때도
"너희는 나의 적이요,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너의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마라.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 하며
기개에 찬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1895년 3월 29일에 손화중,김덕명 등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농민전쟁의 실패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부르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하는 노래는 아직도 전국에서 조금씩 가사를 달리하며 전해지고 있다
노랫말에 나오는 파랑새는 그의 성인 전(全)자를 풀어 팔왕(八王)새라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전봉준선생고택지(全琫準先生故宅址)

 

사적 제293호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에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 순서의 일(一)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남부지역 민가 구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