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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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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후기

반나절의 답사.경기 남양주

푸른새벽* 2010. 4. 30. 17:14

春來不似春...

맞다.

며칠동안 하늘은 비.흐림.바람의 패를 생각나는대로 내밀며 냉냉한 자락을 흔들어 이 좋은 계절을 망치고 있다.

흉노족의 왕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던 前漢의 후궁 王昭君의 심정이 이랬을까.

2010년 4월은 그야말로 春來不似春이다.

 

답사걸음을 작정할 땐 꼭 맑은 날을 택한다.

내 정서로는 흐리고 바람부는 날이 좋기는해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녀야하는 답사에 질척한 날씨는 못마땅하다.

 

하늘의 변덕이 잠시 뜸들이는 듯 싶었던 어제.

예정되어 있는 강릉으로의 답사는 그곳의 날씨 또한 심상치않다는 기상청의 예보에 며칠 뒤로 미루고

가까이 있지만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몇군데를 가볍게 돌아보리라 작정하고 집을 나섰다.

 

광릉.봉선사.순강원.사릉.광해군묘.홍릉.유릉...

 

가장먼저 찾았던 광릉.

평일 점심시간이 가까운 때라 주차장은 비어 있었지만 주차요금은 2000원.

광릉 입장료 1000원.

 

매표소에서 공사중이란 말은 들었다.

며칠동안 내렸던비로 질척이는 길에 공사차량의 바퀴자욱이 선명하다.

 

 




광릉의 정자각은 보수중이었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양쪽의 능묘까지 모두 가림막으로 막아 놓았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저 멀찍이서 사진기로 몇 컷 당겨서 찍다가  생각해보니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이럴거면 입장료는 왜 받는가.

매표소에선 그저 공사중이란 말만했고 입장권을 팔고 또 검표까지 했다.

묘역의 바로 아래쪽으로는 약수터로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광릉에선 약수터가는 사람들에게도 입장료를 받을까?

공사중인 정자각 근처에서 어슬렁(?)대는 사진사인 듯 싶은 사람이 있어 물어보았더니

약수터가는 사람들에게는 입장료 받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광릉에 왔다고 하지말고 약수터 간다고 하면 입장료 내지 않아도 되겠네~

약수터가는 사람들은 능묘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말란 명문조항은 없을 것이니.

삼십층 건물을 쳐다 보려면 층층마다 돈을 내야한다는 사기꾼에게 

건물을 다 훑어보고 십층까지 밖에 보지 않았다고 딱 잡아떼고 즐거워했다는 어눌한 사람을 희화화한 코미디가 생각났다.

딱 그짝이다.

 

잠깐 동안 텅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주차료를 낸 것이 억울하기는 했어도 그러려니했는데

이건 해도 너무한다.

 

 




부아가 나서 울렁불렁하는 맘을 진정시키고 그냥 돌아나올까 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주차장 근처에 있는 광릉관리사무소로 들어갔다.

너무 조용해 사람이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들어왔으니 불러라도 봐야겠다 싶어 "계십니까?"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예~ 죄송합니다.그러시다면 매표소에 가서 환불해 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이것참.

소중한 문화재를 보려고 왔는데 문화재를 보지 못했으니 입장료 돌려받으려 왈가왈부 억지부리는 성질 사나운 아줌마가 된 꼴이다.

사실은 내 입장료가 아까워서 환불받겠다고 그런 것은 아니고 미리 매표소에서 그런 사정을 말하고 입장료를 받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앞으로 이곳을 애써 찾아오는 답사객들에게 미리 그렇게 알려주면 좋겠다 싶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더니

잠시 기다리라면서 안으로 들어가더니 비닐로 포장된 책을 한 권 들고 나와서 건네주었다.

"선생님의 의견을 참고하여 앞으로는 그런일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쓰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의 왕릉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면 좋겠다싶어 드리는 겁니다."

여러가지 사정은 있지만 하여튼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며 작은 것 하나라도 세심하게 다시 신경쓰겠다는 말도 함께 들었다.

 

부옇게 화가나서 들어갔던 관리소에서 사근사근한 관리인의 사과를 듣고 책 한권 받아들고 나오니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먹은 놈이 물켠다더니.

 

 




 다음의 답사처로 찾은 곳은 광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봉선사.

봉선사는 내가 참고하는 자료나 책으로 한가지 각인된 것이 있는 절집이다.

법당의 편액이 한글로 되어 있다는.

 

근래에 새로 만들었지 싶은 웅장한 일주문

일주문의 편액도 한글이다.

아~운악산 봉선사구나~!

 

넓디넓은 주차장

주차요금을 받지 않는 주차장에서 왜 저리 일주문에 바짝 붙여 주차를 했을까.

 

 




 십여년 가까이 답사를 다니면서 수도 없이 많은 절집을 찾았었고 또 불친절한 절집에서 냉대도 많이 받았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한동안 벌렁거리는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절마당 한켠에서 얼마나 가슴을 쥐고 서 있었는지.

사진에 뒷모습이 보이는 여인네...

 

봉선사 청풍루로 오르는 계단 왼쪽에는 괘불대지 싶은 것이 있었다.

작은 글씨로 적어놓은 안내석에는 당간지주라고 되어 있기에 당간지주는 아닌것 같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야~ 이 미친년아 어따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지랄이야.

카메라를 들이댈려면 니 면상에다 들이댈 것이지 어디와서 사진을 찍고 지랄이야? 못된년.하여간 별 미친X들 때문에 아주 속이 상해죽겠네."

그러고도 분이 안풀렸는지 한참이나 쌍 시옷에 지읏이 섞인 욕을 해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참하고 얌전한 옷차림과 명품가방에 선글래스까지 쓴,옆구리에 책을 낀 여인네의 앙칼이었다.

분명 나를 보고 한 소리였다.

그 근처엔 사진기를 든 사람이 나 밖에 없었으니까.

그러고도 씩씩대며 나를 잡아먹을 듯 하얗게 눈을 흘기더니 쌩하니 지나쳤다.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이냐.

조용한 절마당이 울릴듯 당당하게 욕을 하는 여인네는 분명 절집에서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거나

절집에서도 영향력이 지대하여 절대 무시못하는 존재일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디...

아~

봉선사의 인심이 이렇구나.

이게 서울근교 절집의 인심이구나.

 

너무도 황망한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놀래 떨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서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놀라셨지요? 저 여자 원래 그래요.저도 봉선사에 자주 오는데 올 때마다 저 여자를 만나지만 매번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에게 그래요.

저도 처음에 저 여자에게 당하고 속상해서 한바탕 싸울까했는데 정상이 아닌 것을 알고는 되레 안쓰럽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놀라셨겠지만 이해해주세요.저렇게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불쌍하잖아요~"

 

푸근하고 순해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내 뒤에서 그 상황을 보았던가 어쩔줄 몰라하는 내게 위로를했다.

 

응? 이건 또 무슨소리?

아픈여자라고? 정상이 아니라고?

황당하고 황망했지만 그 소리를 들으니 조금 진정이 되긴했다.

사람에 대해 무슨 원망이 그리도 깊어 저렇게 얌전하게 생긴 여인네가 만나고 눈길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에게 시퍼런 날을 휘두르고 다닐까.

그나저나 그 여인 때문에 봉선사를 인심고약한 절집으로 치부하려했던 것이 부끄러워 어쩌나...

아무튼

점심은 먹지 않아도 되지 싶다.

욕을 그렇게 바가지로 먹었으니.

 

 




 허탈하기도하고 맥이 빠져 부처님의 가피를 바라는 알록달록한 마음들이 새겨진 연등이 그리 고와보이질 않았지만

이 연등을 달아놓은 사람들의 애절한 염원처럼

나에게 당혹감과 허탈감을 안겨준 가시처럼 뾰족한 그 아픈 여인이 부디  순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해 주십사고 마음으로 빌었다.

 

 




큰법당이라 쓰여진 편액

이 현판은

춘원 이광수의 팔촌동생이며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운허(耘虛.1892~1980)대사의 뜻과 정신이 흐르는 것이라고 한다.

대사는 東國譯經院을 개설하여 고려대장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주도했던 근세 최고의 학승답게 이러한 한글 현판과 주련을 만들었다.

 




 

보물 제 397호로 지정된 봉선사 대종

종각의 둘레에 걸린 연등과 목련의 조화가 부처님오신날의 축하로 손색이 없다.

 





세워둔 자동차로 돌아와 잠시 냉수로 목을 축였다.

놀래기는 많이 놀랬던가 보다.

입술이 자꾸 마르고 목이 칼칼한 것을 보니.

오늘 일진이 좋지 않은가.

어깨도 아프고 썩 즐거운 기분도 아니고 먼 곳으로 답사를 온 것도 아니기에 그냥 돌아갈까 싶은 맘도 굴뚝 같았지만 어차피 나선 길인데...

 

 




봉선사 다음의 답사처인 순강원(順康園)

분명 능묘일텐데 순강원(順康園)이라는 것을 보니 왕의 능은 아니고...

조선 14대 왕인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1555∼1613)의 무덤이다.

인빈김씨는 16대왕인  인조의 할머니인데 영조 31년(1755)에 무덤을 순강원이라 명하고 지위를 승격시켰다.

 

 




광릉관리소에서 비공개라는 사실을 알고 왔지만 이렇게 뚝뚝한 안내문을 확인하고나니 미련갖지 말고 돌아가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까하다가 순강원문을 살짝 들여다보니 관리인 인듯 싶은 분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탁을 한번 해보자.

이럴 땐 그저 공손한 것이 최고지.

 

"선생님~ 이곳이 비공개인가요?"

"네.돌아보고 싶으시면 광릉관리소에 연락을 미리 하셔야 합니다."

"네~ 광릉관리소에서 그리 말해주었는데 그냥 왔어요.어떡하지요?"

"광릉관리소에서 전화로 연락을 받아야하는데 전화연락은 못받았어요...그런데 몇 분이 오셨나요?"

"혼자예요."

"네~ 그러면 조용히 살펴보시지요."

 

고맙단 말을 하고,말 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하고 순강원으로 들어갔다.

 

 




관리인을 만난 곳은 제실이었는데 제실에서 능묘쪽으로 걸어가다 만난 것은  손조의 여덟째 아들인 의창군의 묘다.

허락은 받고 왔지만 어쩐지 조급해져 샅샅이 살펴보지는 못했다.

 

 




순강원의 정자각과 비각

 

 




사적 제 356호로 지정된 순강원엔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가 잠들어 있다.

비공개지역을 들어와서 그런지 맘이 급해지고 편치 않았다.

대충 돌아봤다는 표현이 맞다.

하긴 난 아직 능묘엔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니까.

 

다시 관리인이 있는 제실쪽으로 돌아와 기꺼이 출입을 허락해주신 아저씨들께 인사하고 순강원을 떠났다.

광릉과 봉선사.순강원이 있는 남양주시 진접읍을 떠나 사릉과 광해군묘가 있는 남양주시 진건읍으로 향한다.

 

맑은 날이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세차지만 자동차 안에선 에어컨을 틀어야 할만큼 더웠다.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있는 사릉.

사릉의 입구엔 이렇게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는 안내판이 있다.

그래도 관람을 원하시면 동쪽의 사무실을 방문하라는 안내대로 사무실로 갔더니 공익이지 싶은 젊은이 둘이 급하게 앞을 막으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금은 관람을 할 수 없고 5월엔 관람이 가능하다고 원칙만 말한다.

이럴 땐

그래도 나이 지긋한 분이 낫다.

이러저러한 사정을 이야기하면 나이 지긋한 대부분의  관리인들은 조용히 살펴보라며 융통성있게 대해주는데

맡은바 임무에 충실한 곧이 곧대로인 젊은이들을 뭐라할 수도 없고...그냥 발길을 돌리는 수 밖에.

 

그래도 광해군묘는 사릉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출입에 제한은 없다는 설명은 들었다.

"거기 볼 것 없어요.그냥 묘만 덩그러니 있는데..."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산 59번지를 찾아가는 길은 도로공사중이라 엄청나게 큰 트럭들이 쉴새없이 오가고 있었고

번잡하게 공사중인 곳을 지나니 작은 길 양옆으로는 축사가 줄지어 있었다.

축사의 고약한 냄새를 뒤로하고 얼마간 좁은 길을 달리니 광해군묘가 있다는 작은 안내표지가 있었는데

그 곳은 유명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이제 조성중인 공원묘원이었다.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그래도 네비양이 시키는대로 직진하여  잘 포장된 도로를 돌아 얼마쯤 올라가니 길 오른쪽으로

녹색의 철책 울타리에 광해군묘라는 표지가 걸려 있었다.

 

 




녹색의 울타리엔 문이 있었다. 혹여 잠겨있을까 싶어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문은 잠기지 않았다.

 

 




인적도 없고 자동차소리도 없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광해군묘엔 봉분이 두 기가 있는데 광해군과 그의 정비 유씨가 함께 있다.

 

광해군묘앞에 서 있는 비석엔 '광해군지묘'라는 글씨가 또렷한데 근래에 시멘트를 덧바르고 그 위에 새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적도 번잡함도 없는 조용하고 고즈넉한 곳에 자리한 광해군묘.

우리는,우리의 역사는 그를 폭군으로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를 기준으로 쓰여진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우리의 후손들은 광해군을 폭군으로 그렇게 남겨둘까...

 

원인없는 결과가 어디 있으랴마는 지금까지 폭군으로 남아있는 광해군은

능(陵)도 아니고 원(園)도 아닌 그냥 범부의 무덤처런 묘로 기록되어 한산한 곳에 잠들어 있다.

관리 허술하면 어떠리.

찾아오는 이 많지 않으면 어떠리.

그래서 오히려 더 편안할지도 모르는 광해군.

잘 정돈된 왕들의 묘역에 견주어 겉모습이 옹색해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왕들이 잠든 자리에 못지 않게 누운자리는 편안했으면 좋겠다.

다른 왕들의 무덤과는 달리 묘역앞이 나무들로 가리워져 있어 답답하기는 하다.

 

 




철책 울타리를 나와서 다시 한번 더 넘어다 보고 발길을 돌렸다.

 

오후 세시.

반나절의 답사로는 마지막인 홍.유릉으로 간다.

 

 




남양주시 금곡동 주민자치센터 옆 홍유릉 입구엔 아마도 홍살문의 지지대로 사용되었음직한 석조물 두 기가 있다.

 

 




작년이던가

조선의 왕릉이 모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

오늘 돌아본 왕릉에서 익히 보았던 안내표지석

 

이 안내석을 볼때마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라기보다는 먼저 아~ 규제가 심하겠구나 라는 생각부터 든다.

 




 

봄은 봄인데 봄같지 않은 봄이지만 나뭇가지는 낭창낭창 요염한 봄을 달고 있다.

 

나무가 뿜어내는 봄의 기운에 아찔한 멀미를 느낀다.

그래 봄은 그렇게 농익고 있었구나.

 

 




홍.유릉은 홍릉과 유릉이 함께 있어 쉽게 그리 부른다.

홍.유릉의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홍릉,오른쪽으로는 유릉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왼쪽 홍릉으로 가다보면 만나는 연못.

홍릉과 유릉의 경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

 

마지막 답사처여서 그랬을까

홍릉의 홍살문 앞에 서니 참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자각을 중심으로하여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문인.무인석과 각양각색의 석수(石獸)들

오늘 보고 온 능들과는 많이 다르다.

 

 




이 건물은 통상 능묘에 세워진 정자각이 아니라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다고 한다.

건물 저 위쪽으로 능이 있을 것이다.

 

 




침전 건물앞에서 뒤쪽의 열린 창으로 보이는 능의 모습이 좋은데 붉은 살창으로 막아놓아 고개를 들이밀어도 보이질 않으니

이렇게 뒤쪽에서 앞의 경관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대로 역시 막아놓았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전,그러니까 3년전 동구릉을 찾았을 땐 그리 관리감독이 엄격하지 않아 마음놓고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이젠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살금살금 붉은살창이 쳐진 길을 따라 담장 옆쪽으로 가니 넘어들어가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곳이 있었다.

사람들의 눈길도 닿을 것 같지 않은.

그래서 잔뜩 허리를 굽히고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역시 왕릉은 이렇게 뒤에서 전경을 살펴봐야 제격이지.

 

 





누가 볼새라 사진 급하게 몇 컷 찍고 다시 담장을 따라 살금살금 내려오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내려오라는 소리겠지.

이럴 땐 그저 죄송하다고 싹싹 빌어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뭐라할거라 싶어 단단히 각오하고 만난 관리인은 사람이 좋았다.

"이렇게 답사를 하시려면 미리 말씀하시질 그러셨어요.사람사는 세상인데 융통성 없이 빡빡해서 어쩝니까.

선생님같은 분들은 오히려 환영합니다.

다만 한가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능묘에 올라가는 것을 제지하였는데 형평상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고 할 수 없으니

근처에 계신 분들이 가고나면 유릉을 살펴볼 수 있는 사잇길을 가르쳐 드릴테니 찬찬히 살펴보세요."

고마운 일이다.

 

한무리의 아낙네들이 능묘에 올라가 보고 싶다는 말을 들은 관리인은 정중하게 올라가면 안된다는 설명을 하였고

나는 하릴없이 그 아낙들이 사라지기만 기다렸다.

 

아낙들이 아쉬운표정으로 사라지고 난 후 나는 그 관리인이 가르쳐준대로 홍릉 침전 앞의  왼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 길은 유릉의 묘역이 보이는 동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묘역을 수호하는 각종 석물들이 앞으로 도열해있는 정자각에서 부터 살펴봐야 하는데 난 거꾸로 살펴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려며 어떠리.

이렇게 능묘위까지 올라올 수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지.

 

유릉은 순종과 동비 순명효왕후, 동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무덤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이라고 한다.

 

갑자기 능묘아래가 왁자하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막아놓은 살창너머로 빼곡히 이쪽으로 향하는 머리들이 보였다.

답사객들인 모양이다.

해설사를 대동한 답사객들의 눈초리가 모조리 내 쪽으로 향하는 것 같아 급히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나를 배려해준 관리인의 입장이 난처해지면 안되므로.

 

 





급하게 자리를 피하며 사진기로 당겨서 담아온 꽃무늬를 새긴 유릉의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

 

 





유릉을 어설프게나마 돌아본 것으로 내 반나절의 답사는 끝이 났다.

 

역시 왕릉은 답사고수의 경지에 들어야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왕릉은 조급한 마음으로 찾으면 절대 안된다.

느긋하게 하루종일 걸려 하나의 능만 보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답사의 고수나 가능한 일이다.

 





 

바람이 몹시 분다.

꽃비가 내린다. 

 

목이 메이도록 아픈 꽃빛에 그만큼 향기롭고 아릿한 사람을 떠올렸다.

둘도 아닌 세상에 하나뿐이었던 인연.

그리고 이 아름다운 봄날 오후의 답사에서 돌아오며 이마가 시리도록 힘껏 던져버렸던 인연.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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