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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화계사(三角山 華溪寺).서울 강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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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화계사(三角山 華溪寺).서울 강북

푸른새벽* 2010. 7. 31. 14:09

 





 

 





 





 





 





 





 





 





 





 





 





 

삼각산 화계사(三角山 華溪寺)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487


서울 삼각산에 있는 절로 조선 中宗 17년(1522)에 信月이 창건하고 光海君 10년(1618) 화재로 전소되자 道月이 중건하였고
그 후 高宗 2년(1865)에 大院君의 시주로 龍船, 梵雲 두 스님이 건물 전체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한때 궁중의 王家 사람들이 드나들며 國泰民安을 비는 등 왕실과 밀접한 인연을 맺어와 일명 궁절(宮寺)로 불리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자료*

 

 

삼각산 화계사(三角山 華溪寺)

 

화계사의 창건과 중수에 대하여는 1938년 안진호 스님이 편찬한 『삼각산화계사약지(三角山華溪寺略誌)』와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 상세히 밝혀져 있다. 이에 의하면 화계사는 원래 고려 광종 때 법인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지금의 화계사 근처인 부허동(浮虛洞)에 보덕암(普德庵)을 창건한 것이 시초이다.

 

그 후 1522년(중종 17)에 보덕암의 신월(信月)선사가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과 협의하여 보덕암이 있던 부허동 남쪽의 화계동으로 법당 3처와 스님들의 요사 50칸을 옮겨 짓고 화계사(華溪寺)라고 고쳐 불렀다. 창건된 지 채 100년이 되지 않은 1618년(광해군 10) 9월에는 화재로 인하여 불전과 요사가 모두 전소되는 비운을 겪고 말았다. 그러나 도월(道月)스님이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창 불사를 하여 이듬해인 1619년 3월에 낙성을 보았다.

 

그로부터 2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에 건물이 쇠락하여 1866년(고종 3)에 용선도해(龍船渡海)스님과 범운취견(梵雲就堅)스님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불전과 승방 건물들을 중수하였다. 그때 지어진 것이 현재의 대웅전과 큰방인 화장루이다.

 

1870년(고종 7)에는 용선스님과 초암(草庵)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875년(고종 12)에 화산재근(華山在根)이 대웅전의 아미타후불탱을, 성암승의(性庵勝宜)가 신중탱, 현왕탱, 지장탱 등을 조성하였다. 1876년에는 초암(草庵)스님이 1875년 궁궐로부터 모셔온 자수(刺繡) 관음상을 봉안하기 위해 관음전을 고쳐지었다. 이 자수 관음상은 1874년 2월에 원자(元子. 뒷날 純宗)가 태어나자 그의 수명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왕비 여흥민씨와 대왕대비 풍양조씨, 왕대비 남양홍씨 등의 발원으로 궁녀들이 수를 놓아 조성해 낸 것이었다. 이전 관음전은 한 칸밖에 되지 않아 비좁았던 까닭에 상궁들이 모두 시주하여 공덕주가 되고 장인들도 다투어 건립에 참여하여 건물을 짓고 단청하는 데에 며칠이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1877년(고종 14)에는 왕명으로 황해도 배천군 강서사(江西寺)로부터 1649년(인조 27)에 조성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옮겨 왔고, 이듬해에 초암스님이 이 존상들을 봉안하기 위하여 시왕전을 고쳐지었다.

 

1880년(고종 17)에는 조대비(趙大妃)가 명부전의 불량답(佛粮沓)을 헌공하였다. 이 무렵 화계사에는 대비와 상궁들의 왕래가 잦아 사람들이 궁(宮)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883년(고종 20)에는 금산(錦山)스님이 조대비와 홍대비(洪大妃)의 시주로 관음전의 불량계(佛粮契)를 설립했고, 1885년에는 역시 금산스님이 산신각을 고쳐지었다.

 

1897년에는 대종(大鍾)을 풍기의 희방사에서 옮겨왔고, 중종(中鐘)을 경도에서 구입하였으며, 운판은 해남 미황사에서 옮겨와 봉안하였다. 1910년 12월에는 월명(越溟)화상이 임종에 즈음하여 강원도 양양 소재의 논 276두락을 헌납하니 이로써 만일염불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에 따라 봉은사의 수반말사로 편입이 되었다.

 

1921년 3월에는 현하(玄荷)·동화(東化) 두 화주가 김창환·민준기 등의 시주를 얻어 관음전 시왕전을 중수 단청하였고, 이듬해에 대웅전 개금불사를 하였다. 1925년에는 주지 한찬우(韓讚雨) 스님이 김종하·오정근의 동참을 얻어 법당 및 큰방 앞뒤의 축대를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 7월에 준공하였다. 1933년 7월에는 조선어학회 주관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 마련을 위한 모임이 화계사에서 열렸고, 그 해 10월에 세상에 공포하였다.

 

1937년에는 종식(鍾植)스님이 낡은 건물들을 정비하고, 삼성암으로 오르는 길가바위에 관음상을 조성하여 여러 신도들이 오며 가며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38년에는 안진호 스님에게 위촉하여 『삼각산화계사약지(三角山華溪寺略誌)』를 편찬 간행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1964년에 천불오백성전을 건립하였고, 1972년에는 진암(眞菴) 스님이 범종각을 건립하였다. 1973년에는 대웅전 삼존불을 조성하였으나, 이듬해 대웅전 오른쪽 관음전이 화재로 소실되는 비운을 겪고 말았다. 1975년 진암화상이 퇴락한 산신각을 증축하여 삼성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근래에는 1991년 대적광전을 건립하고, 1992년에는 국제선원을 개원하여 외국인 스님들의 수행처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1998년에는 일주문을 건립하였고, 2001년에는 성광스님이 명부전을 보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 시왕 등을 보수하였다. 200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하였다.

*한국전통사찰정보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