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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진관사(三角山 津寬寺).서울 은평구 본문

☆~ 절집.절터/서 울

삼각산 진관사(三角山 津寬寺).서울 은평구

푸른새벽* 2006. 9. 23. 00:21

 




 




 




 




 




 




 




 




 




 



 

삼각산 진관사((三角山 津寬寺)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1번지

 

진관사(津寬寺)는 은평구 진관외동 1번지 삼각산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소속 사찰이다.


불광동에서 박석고개를 넘어 구파발에 이르기 조금 못미처 오른쪽으로 길이 뚫려 있는데, 요즈음 이 길은 기자촌으로 가는 길이라 널리 알려졌다. 이 길을 따라 신도국민학교를 지나서 기자촌 입구에 다다르면 버스 종점에 이른다. 오른쪽으로 뻗은 큰 길은 연신내·불광동과 이어지는 연서로이고, 왼쪽으로 뚫린 좁은 길이 진관사와 삼천사에 이르는 길이다.


좌우에 늘어선 주택가를 빠져나와 나즈막한 언덕길을 넘어서면 비교적 너른 들판이 왼쪽에 전개된다. 언덕을 내려서면 바로 샛길이 갈라지는데 이 길은 삼천리 골로 이어진다. 샛길로 빠지지 말고 큰길을 따라가다 다시 한번 구비길을 돌아서면 가게가 늘어선 유원지에 다다른다. 왼쪽의 개울에서 다리를 건너기 전에 오른쪽 벼랑을 눈여겨보면 바위에 ‘선유동(仙遊洞)’이란 글자가 새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리를 건너면 높다란 돌기등을 주춧돌로 삼은 일주문이 서 있는데, 현판에는 ‘삼각산 진관사’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오른쪽에 계곡을 두고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면 운치있게 쌓은 석축이 왼쪽에 보이고, 이어 홍제루(弘濟樓)가 나타난다. 발걸음을 왼쪽으로 꺾어 홍제루에 들어서면 바로 눈 앞에 대웅전과 더불어 사찰의 경내 모습이 펼쳐진다.

 

일찍이 진관사는 ‘동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보개산 심원사’라고 하여 한양 근교의 4대 사찰로 일컬어질 만큼 이름난 사찰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임금이 여러 번 행차하여 물 속의 외로운 넋들과 아귀를 위해 법석을 베푸는 재를 올려 더욱 유명하였다. 그러나 언제 어떠한 연유로 창건되었는지는 전해오는 사료가 적어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원효스님이 진관조사(津寬祖師)와 더불어 삼천사와 이 진관사를 함께 세웠다고 전하나 신빙성이 적다. 한편 고려 현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이곳에 대가람을 짓고 절이름을 진관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간추려 보자.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는 고려 제 5대 경종의 왕비로서 목종의 생모이다. 경종이 981년에 죽자 왕비는 천추태후(千秋太后)가 되었는데 파계승 김치양(金致陽)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이 추문을 들은 성종은 김치양을 유배 보냈다. 997년 성종이 죽고, 아들인 목종이 18세로 왕위에 오르자 태후는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타 천추태후는 유배갔던 김치양을 불러 우복야겸 삼사로 삼아 권력을 휘둘렀고, 마침내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목종이 후사를 헌종왕후가 낳은 대량원군으로 정하니 천추태후는 김치양으로 하여금 궁궐에 불을 지르고 반역을 꾀하였다. 이 난은 결국 강조(康兆)에 의해 평정되어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였다.


천추태후는 아들이 없는 목종의 후계자로 정해진 대량원군을 참소하여 숭경사에 가두고, 호시탐탐 살해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뜻을 이루기 어려워 다시 피납처를 옮기니 그곳이 신혈사(神穴寺)였다. 당시 신혈사는 북한산에 있는 조그만 절로 진관(津寬)스님이 혼자서 수도하고 있었으므로 사람의 눈을 피해 대량원군을 죽이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눈치챈 진관스님은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당시 12살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게 하였다. 여기서 3년을 보낸 뒤 마침내 1009년 대량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려 제8대 임금인 현종이다.


현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듬해인 1011년에 진관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신혈사 자리에 절을 짓고, 이름을 진관사라 바꿨다. 그 뒤 절은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이 행차하는 등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1090년(선종 7) 10월 선종이 절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099년(숙종 4)9월과 1110년(고려 예종 5) 10월에도 왕이 절에 행차하여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절은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수륙재란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외로운 영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을 지어 505년에 재를 베풀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로부터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성행하였는데 이곳 진관사의 수륙재는 그 시초가 된다.

 

고려시대 이래 역대 왕들이 자주 왕래하면서 크게 융성하였던 진관사는 이제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조영된 수륙재의 시설물은 모두 59칸에 달하였고 상·중·하의 삼단으로 이루어져 중단과 하단에는 행랑이 연이어 있었다. 특히 하단의 좌우에는 왕실의 조상 영혼을 모시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며 있었다. 이곳에서 매년 2월과 10월의 보름날에는 어김없이 국가의 수륙재가 성대히 개최되었다. 불교를 배척하였던 태종도 1413년(태종 13) 선조의 뜻을 이어 절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었다. 이때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리고 수륙재와 사찰의 운영에 쓰도록 토지 100결을 하사하였다. 국가통치를 위한 유교의 숭상이 불교의 배척으로 나타났지만 여전히 불교는 신앙으로서 왕실에서도 크게 신봉되고 있었음을 엿보게 된다.


1414년(태종 14)에는 2월의 수륙재를 1월로 옮기기는 하였지만 이제 수륙재는 조선 왕실의 명실상부한 공식행사로서 매년 두 차례씩 열렸고, 진관사는 이와 더불어 국가적 사찰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문종 2년(1452) 3월 절은 다시 한번 크게 중수되는데 이때 국가에서 도봉산과 북한산의 소나무를 벌채하도록 허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 뒤 1463년(세조 9) 화재가 일어 가람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7년 뒤인 1470년(성종 1)에 벽운(碧雲)스님이 다시 중수하였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중창이 있었을 것이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고, 1707년(숙종 33) 절의 서쪽 언덕에 정소의(定昭儀)의 묘를 마련한 것을 계기로 절에 정원당(定願堂)이라는 전각을 세웠다.


1854년(철종 5)과 1858년(철종 9) 각각 중수하여 명맥을 이어나갔다. 1879년(고종 16) 3월에 당두(堂頭)화상 경운(慶雲)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중수하여 대중들의 처소로 삼았다. 1908년에는 송암(松庵)선사가 여러 사람과 힘을 합쳐 경매에 5층탑을 세웠다. 1910년에는 경운스님이 많은 재산을 헌납하여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고, 아울러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시왕탱화 등을 개금·보수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짓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모두 절에 돌려 백련결사염불회의 자원으로 쓰게 하였으니 경운스님은 진관사의 근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공헌이 큰 인물이라고 하겠다.


이후 절은 1950년 6·25의 와중에서 나한전 등의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으나 1964년부터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 부단한 정진으로 가람을 일신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들이 변해 가듯이 진관사도 창건이래 천년 가까이 법등을 이어 오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대한불교진흥원자료*

 

 

* 삼각산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는 길에 잠시 들러본 진관사

내 유년의 기억 저편에서 아슴아슴 했던 절집이었다

아마도 가장 처음 가 본 절집이 아니었나 싶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였으니...

 

최 정상에도 못미친  산행이었지만 무척이나 덥고 지쳐있었고 일행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그저 대충 후딱 사진 몇 컷만 담았다

촛점도 흐리고 앵글도 제대로 못 맞추었던 것 같다

엉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