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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호거산 운문사(虎距山雲門寺).경북 청도 본문

☆~ 절집.절터/경 북

청도 호거산 운문사(虎距山雲門寺).경북 청도

푸른새벽* 2010. 10. 27. 08:12

 

 





 





 





 





 





 





 





 





 





 





 





 





 





 





 





 





 





 





 





 





 









 

 





 









 

 





 





 





 





 





 





 





 





 





 

호거산 운문사(虎距山雲門寺)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운문사는 앉음새가 특이하다.모든 건물이 돌아앉았다.산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보이고 있다.산세를 따르다보면 모든 건물을 북향으로 앉혀야 하기 때문이다.찾아가는 사람은 운문사의 뒷모습부터 보게 되는 셈이다.풍수적으로 풀면 호거산(虎距山)을 마주할 때 생기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란다.호거산이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또 북향하면 골짜기의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게 되어 재화나 부와는 인연이 멀게 된다고도 한다.풍수에서 물은 곧 재화를 뜻하니 항상 물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인다면 낭패라는 것이다.그러나 무엇보다 남향한 집이 사람 살기에 좋은 것이다.


이러한 터전에 절이 들어선 것은 멀리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조선 숙종 44년(1718) 채헌(彩軒)이라는 스님이 쓴 「虎距山雲門寺寺蹟」에 의하면,지금의 운문사에서 5리쯤 떨어진 금수동(金水洞)에 들어와 3년을 수도하여 득도한 어느 도승(道僧)이 고구려 평원왕 2년(560) 도우(道友) 10여 명과 함께 갑(岬)자 들어가는 다섯 개의 절(五岬寺)을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오갑사는 가운데 자리잡은 대작갑사(大鵲岬寺)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 9천 보(步)지점의 가슬갑사(嘉瑟岬寺),남쪽 7리쯤에 있던 천문갑사(天門岬寺),서쪽 10리에 자리한 대비갑사(大悲岬寺),그리고 북쪽 8리에 위치한 소보갑사(所寶岬寺) 등이었다.이 가운데 대작갑사가 오늘의 운문사이다.그밖에는 대비갑사만이 대비사(大悲寺)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을 뿐 다른 절은 모두 없어졌다.


「운문사사적」은 운문사의 첫번째 중창자로 원광(圓光)법사를 들고 있다.가슬갑사에서 두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項)에게 유명한 '세속오계'를 내려준 바로 그 스님이다.그 내용은 591년 중국에서 귀국한 원광법사가 처음 3년 동안 대작갑사에 머물다 가슬갑사로 옮겨갔다는 것이다.이 기록에 따르더라도 원광법사가 대작갑사에 3년간 머물렀을 뿐 절을 중창했다는 사실은 볼 수 없다.더구나 그 앞뒤의 글은 모두 『삼국유사』 「圓光西學」의 일부를 옮긴 것인데,바로 운문사에 머물면서 그 책의 저술에 몰두했던 일연스님은 오히려 원광법사와 운문사의 관련을 명확히 부정하고 있다.그는 위의 책「圓光西學」과 「寶壤梨木」의 끝부분에서 『續高僧傳」이나 『수이전(殊異傳)』에는 원광법사가 운문사와 관련되었다는 어떠한 사실도 들어 있지 않은데,김척명(金陟明)이라는 사람이 거리에 떠도는 얘기를 잘 못 듣고 보양(寶壤)스님의 사적과 뒤섞어 기록하는 바람에 원광스님과 운문사가 연관 있는 것처럼 되었다고 그듭 말하고 있다.따라서 원광법사가 운문사를 중창했다는 사실은 그대로 믿기 어렵고,다만 그가 가슬갑사에 머문 것은 분명하므로 간접적인 관련은 어느 정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후 운문사의 사정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후삼국의 어지러운 전란 속에서 다시 역사 위로 떠오른다.「운문사사적」에서 두번째 중창자,『삼국유사』에서 개산조(開山祖)로 꼽는 보양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이보다 앞서 보양스님이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추화(推火,지금의 밀양)의 봉성사(奉聖寺)에 머물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청도의 경계까지 쳐들어갔는데 산적의 무리들이 견성(犬城)에 웅거하여 거만을 부리는 통에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왕건이 산 아래로 내려와 보양스님에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묘책을 물으니 스님은 이렇게 일러 주었다.


"무릇 개라는 짐승은 밤에만 지키지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앞을 지키지 뒤를 지키지는 않습니다.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야 합니다"
(夫犬之爲物,司夜而不司晝,守前而忘其後,宜而晝擊其北)


이렇게 인연을 맺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보양스님이 이곳에 작갑사를 세웠다는 말을 전해듣고 오갑(五岬)의 땅 500결(結)을 절에서 부치도록 했으며,태조 20년(937)에는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운문사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다.


고려왕조의 창업에 군사적으로 한몫을 거들어 사세를 키운 운문사는 이윽고 원응국사(圓應國師,1052~1144)때에 전성기를 맞는다.인종이 즉위하던 1122년 왕사의 자리에 오른 스님은 인종 7년(1129)운문사로 들어왔다.이때 나라에서는 신수와 신원등의 토지 200결과 국노비(國奴婢) 500명을 운문사에 귀속시켜 만세토록 향화(香火)를 받들게 했으며,스님이 운문사를 중창하자 '雲門禪院上寺'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절은 나라의 500선찰(禪刹) 가운데 제2선찰이 되었다.


절정기를 지나면서 운문사의 역사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는다.원응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나자 무신정권 아래서 민란과 노비반란이 전국을 휩쓸 때 청도.밀양 등 경상도 지역에서도 농민항쟁이 크게 일어났다.명종 23년(1193)에 일어난 이른바 김사미난.초전의 난이 그것인데,그 중심지가 바로 운문산과 그 일대였다.운문의 김사미와 초전의 효심이 연합전선을 편 이 농민항쟁은 10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계속되다가 조직도,체계도,유능한 지도자도,뚜렷한 지향점도 없었던 탓에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한 세기 가까운 농민항쟁이 수그러들고 몽고의 간섭기가 시작되는 1277년 운문사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스님을 맞이하게 된다.『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이다.이미 72세의 노경에 든 스님은 1282년 충렬왕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떠날 때까지 운문사에 머물며 민족의 문화유산 『삼국유사』의 집필에 힘을 쏟았다.4비 가운데 행적비가 바로 일연스님의 행적비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불행스럽게 이 또한 전해지지 않으니 운문사에서 스님의 자취가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그저『삼국유사』가 전해지는 것만도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이후 운문사의 내력은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조선조를 넘기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거개의 사찰들이 그러하듯 임진왜란의 병화를 ㅁ녀하지 못한 듯하고,그뒤 몇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20세기를 맞고 일제강점기를 넘겼다.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던 1958년 운문사에는 비구니 저문강원이 개설되었으며,차츰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어 오늘날은 언제나 200명 이상의 학인들이 공부하고 수도하는 비구니들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운문사는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다.절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담장의 중간쯤,범종이 걸린 이층누각의 아래가 정문이며 첫문이자 마지막문이 된다.이만한 규모의 절에 문이 하나뿐이라는 것도 이상하고 그것조차 앞도 뒤도 아닌 허리쯤에 위치한 점도 의아스러워 본디 이랬을까 의문이 나는데 사실은 어떠했는지.


문을 들어서면 곧게 뻗은 절의 서쪽을 감돌아 흐르는 계곡,약야계(若耶溪)까지 그대로 이어진다.이 길의 오른편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비로전,만세루,그밖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왼편으로는 2기의 석탑과 오백전,작압전,관음전,기타 몇 채의 전각이 나란하다.운문사의 예배공간.신앙공간이다.그 나머지 건물균형은 일상생활과 수행이 이루어지는 생활공간.수행공간이다.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것은 예배공간까지이다.


종각에서 약야계까지 절을 가로지르는 곧을 길을 따라가다보면 이번에는 세로로 절을 관통하는 깅릉 두 군데 더 볼수 있다.이렇게 반듯한 길이 가로세로 절을 나누다보니 어느 지점에 서면 단번에 크고 넓은 절을 모두 보아버린 느낌이 들어 깊은 맛이 나지 않는다.절 전체가 잘 구획된 신도시의 한 부분을 옮겨놓은 듯 인위의 냄새가 지나쳐 자연스럽지도 못하다.절 안의 분위기가 산뜻함은 몰라도 유서 깊은 절에서 느낄 수 있는 안온함.푸근함과는 거리가 멀다.모르긴 해도 운문사 스님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긴장하고 경계하며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들을 언뜻언뜻 발견할 것이다.외부의 시선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가람의 구조로는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감싸고 보듬어주질 못하는 것이다.운문사는 크기에 비해 깊이가 없다.


운문사는 국가가 지정한 보물을 7점이나 갈무리하고 있다.그런데도 그에 걸맛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이거다 싶은 특출한 문화유산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이들이 유기적으로 공존하면서 상승작용을 하는 게 아니라 낱낱이 흩어져 별개로 존재하는 까닭이다.이 또한 가람의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