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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용천사(湧泉寺).경북 청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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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용천사(湧泉寺).경북 청도

푸른새벽* 2010. 10. 22. 10:34

 





 

 





 





 





 





 





 





 





 





 





 





 





 





 





 





 

청도 용천사(湧泉寺)

 
경북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1062


용천사(湧泉寺)는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1062번지 비슬산(琵瑟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
비슬산은 [삼국유사]에 포산(包山)으로 나오는데, 옛날 현풍현(玄風縣)의 진산으로서 주변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름 그대로 주변 일대를 감싸 안듯이 웅장하게 자리잡은 명산이다.

 

용천사의 연혁에 관해서는 '청도군각북면용천사사적(淸道郡角北面湧泉寺蹟)'이라는 목판본 책자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책은 1927년에 간행되었는데, 1702년(숙종 28 김진규(金鎭圭, 1658~1716)가 지은 사적기와 1703년 행규(珪行)가 지은 '용천지(湧泉誌)'를 한데 엮은 것이다. 김진규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01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대제학,예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다.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사적기는 불과 1년의 시차를 두고 쓰여져서 그런지 창건과 임진왜란 이후 중건된 내역에 관하여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 김진규의 사적기가 글 앞 부분에서 창건주인 의상 대사가 중국에 유학 가는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시작하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특히 김진규의 경우 그가 당대의 명망 있는 문신이자 유학자, 그리고 고위 관리라는 입장에 있으면서 이러한 사적기를 썼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불교에 대해 깊은 이해를 지닌 인물이었던 데다가, 당시 용천사가 그만큼 비중 있는 사찰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진규의 사적기에 따르면 의상 대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670년(문무왕 10) 전국에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창건하였는데, 용천사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으며, 당시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 의상 대사가 '화엄경'을 새긴 상아(象牙), 곧 ‘상간(象簡)’ 8매로 불법을 전하였는데, 나중에 그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려 목판으로 보충하였다.


또한 삼국시대에 관기(觀機),도성(道成),반사(搬師),첩사,도의(道義),자양(子陽),성범(成梵),여백(女白),우사(牛師) 등 이른바 구성(九聖)이 이곳에 머물렀었다고 한다.


고려에서는 원종(元宗, 1260~1263)대에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 중수하면서 용천사라고 하였다가 다시 불일사(佛日社)로 바꾸었다. 일연 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원종 임금이 경주로 행차하면서 불일사에 들렀는데, 원종은 일연 스님을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일연 스님이 지은 결사문(結社文)에 서명까지 하였다. 이로써 불일사가 더욱 유명해지고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앞서의 '용천사사적'에 수록된 김진규의 사적기와 행규의 '용천지'에는 의상 대사의 창건과 일연 스님 때의 중창 사실에 이어서 당대의 중건 사항이 매우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용천사는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난으로 당우가 소실되고 여러 성보를 약탈당하는 등 사세가 몹시 기울었다.


그러나 1631년(인조 9) 조영(祖英) 스님 등이 중건하여 다시금 본래의 면목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위의 두 사적기가 간행될 무렵인 1702년~1703년에는 고려시대 일연 스님 주석 당시의 사관(寺觀)을 대부분 회복한 듯이 보인다

*대한불교진흥원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