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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태화산 마곡사(麻谷寺).충남 공주 본문

☆~ 절집.절터/충 남

공주 태화산 마곡사(麻谷寺).충남 공주

푸른새벽* 2011. 4. 16. 20:56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번지


마곡사의 창건과 관련된 연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철종 2년(1851년)에 향보(享甫) 이원횡(李源橫)이 쓴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와 연대와 필자미상의 '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략초(禪敎兩宗大本山麻谷寺緣起略抄)'를 비롯한 일부 자료를 통해 그 역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조선 효종 원년(1650년) 승려 覺淳이 마곡사를 중창하기 시작한 이후의 연혁은 소상히 밝히고 있으며, 그 내용도 사실적이다. 그러나 창건부터 각순에 의한 중창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단편적일 뿐 아니라 믿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이 마곡사의 연혁에 대해 밝히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이므로 이를 통해 마곡사의 연혁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마곡사가 위치한 태화산에 자리 잡은 마곡사 터는 동방 제일의 복지로서 당 정관 17년(643년), 곧 신라 선덕여왕 9년(640년)에 자장율사(590~658년경)가 당에 들어가 태종을 뵈니 태종은 제자의 예로서 자장율사에게 국통(國統)의 호를 내렸다고 한다. 율사가 귀국하자 선덕여왕이 전(田) 200결을 내리고 마곡사를 창건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어 자장이 당에서 돌아와 7대 가람을 창건하였는데, 마곡사가 그 세 번째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관 17년과 선덕여왕 9년 사이에는 3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자장이 당에 들어간 해가 정관 10년이고, 선덕여왕이 당 태종에게 자장의 귀국을 청해 자장이 귀국한 해가 정관 17년이어서 연도에 차이가 있다. 또한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도선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는 자장이 십여 곳에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 것에 반해 이 기록에서는 7대 가람을 창건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더욱이 선덕여왕 시기 공주 지역은 백제에 속하는 영토로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자장이 이곳에 절을 창건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마곡(麻谷)’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는 보철화상이 법을 얻어 오자 사람들이 삼(麻)처럼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사방에서 이 절로 법을 물으러 오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골을 가득 메운 모습이 삼과 같아서 ‘마곡’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승려 중에 보철이라는 인물은 없으며, 중국 조계(曹溪) 혜능(慧能)(638~713년)의 증손 제자인 마곡 보철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철이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신라 말에 성주산문을 개창한 낭혜화상 무염(880~888년)이 마곡 보철의 법을 받아오기는 하였으나 그 또한 마곡사와 연관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충청도 내포 지역에서는 청양의 장곡사, 공주의 마곡사, 예산의 안곡사(현재 소실)를 ‘삼곡사(三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긴골절’이나 ‘삼골절’ 등의 우리말이 ‘장곡사’나 ‘마곡사’ 같은 한자어로 바뀌게 되었고, 그 이름이 마곡이다 보니 중국의 마곡 보철이 연상되어 그 관계 속에서 창건주를 마곡 보철과 연관시킨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마곡사의 창건을 자장율사나 마곡 보철과 연관짓고 있는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은 믿기 어려우며, 현재 믿을만한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창건 이후의 연혁에 대해서도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초창은 자장(慈藏), 재조(再造)는 불일보조(1158~1210년), 삼건(三建)은 통효범일(810~889년), 사수(四修)는 도선(827~898년), 오성(五成)은 각순이라 적고 있다. 고려 명종 때 불일보조가 제자인 수우와 함께 마곡사를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보조는 범일이나 도선보다 앞서는 시기의 인물이어야 하므로 여기에서의 보조는 고려의 불일보조가 아닌 신라 말의 보조선사 체징(804~880년)이어야 선후관계가 성립된다.

 
보조 체징은 그 고향이 공주이며, '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략초'에도 보조 체징에 의해 마곡사가 창건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곡사는 신라 말 9세기경에 보조 체징에 의해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당시 마곡사는 대규모의 가람은 아니었으며,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언급된 것처럼 국사천 서쪽의 미타주와 북쪽의 삼부도전, 절 남쪽의 율암 정도가 있었던 작은 규모의 가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략초'에는 범일이 신라 문성왕 9년(847년)에 법우(法宇)를 확장하였고, 헌강왕 3년(877년)에 도선이 법우를 중수하여 도량을 일신했다는 간략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보조 체징에 이어 통효 범일과 도선으로 이어지면서 마곡사가 확장,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보조 체징은 가지산문의 창시자이며, 통효 범일은 사굴산문의 개창자이고, 도선은 동리산문에 속하는 인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 구산선문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각순이 마곡사를 중창할 무렵인 효종 때에는 불교계가 조계서종으로 단일화 되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각순이 황폐해진 마곡사를 중창하면서 절의 격을 높이기 위해 구산선문의 개창자들을 중창주로 모셨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도 국사당에는 이들 세 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는 고려 신종 2년(1199년)에 불일 보조가 왕명에 의해 도적을 물리치고 마곡사를 중수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후 12세기말부터 15세기 후반 사이에 건립되었던 30여 채에 이르는 건물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희지천(현.마곡천) 북쪽에 옛날 지었던 건물로 대웅전을 비롯해 시왕나한전, 진여문, 범종루, 향로전, 좌우승선당, 동서상실, 약사전, 서전, 성현대, 월파당, 총지료, 동별마구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영산전, 흥성루, 해탈문, 천왕문, 영자전, 향로전, 제주실, 월명당, 매화당, 낙화당, 백운당, 내외남전, 국사당, 가사당, 만경대, 응향각 등이 있었다. 이 외에 주변에 명적암, 은적암, 영은암 등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후반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마곡사가 상당히 번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의 남원과 북원으로 이루어진 마곡사의 기본적인 배치기 이 무렵에 이미 그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현재 대광보전 앞에 위치한 5층 석탑 역시 고려시대 말기에 마곡사가 번영했음을 보여준다. 이 석탑은 고려 말에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전체적인 조형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르다. 특히 청동제 상륜부는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조형으로 라마탑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밖에 대광보전의 본존불은 조선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고려의 국력이 왕성하던 12세기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불상이 고려시대의 것이라면 5층 석탑과 함께 이 불상은 마곡사가 고려시대를 통해 계속해서 번성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조선시대 초기 마곡사의 상황에 대해서는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기록된 세조와의 인연을 통해 그 존속을 알 수 있다. 명나라 헌종 성화 연간(1465~1487년)에 세조가 이 절에 들렀다가 응봉(鷹峰) 아래 작은 봉우리에 올라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라 하면서 끝없이 감탄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영산전(靈山殿)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편액을 내려주시고 잡역의 부담을 면해주는 수패(手牌)를 내렸는데 병란에 그것을 잃어버려 애통할 따름이다. 지금 그 작은 봉우리를 일컬어 군왕대(君王臺)라 부른다. 현재 마곡사 영산전 현판에는 ‘세조대왕어필(世祖大王御筆)’이라는 글이 적혀 있고, 1457년에 세조가 온양 온천으로 내려오는 길에 광덕사와 개천사에 들러 노역을 덜어주고 토지를 하사하는 교지를 내린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기록은 사실에 부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세조 이후 인조 때까지의 기록은 없다. 인조(재위 1623~1649년) 무렵에는 약 60여 년 동안에 걸쳐 승속(僧俗)이 모두 사라지고 황폐해졌으며, 문적과 사찰 소유의 나라에서 하사한 전결(田結)까지 모두 사라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 효종대(1649~1659년 재위)에 들어와 승려 각순에 의해 중창되는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전의 기록에 비해 각순에 의한 중창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사실과 매우 부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각순에 의한 중창은 효종 즉위 2년, 즉 1650년에 시작된다. 각순은 공주목사로 내려온 유곡(楡谷) 이태연(李泰淵)을 통해 청동 2,000지(紙)와 백미 300석을 지원받음으로서 중창공사를 시작한다. 이로부터 효종 10년(1659년)까지 10년 동안 이루어진 중창 공사로 현재 계곡 건너편 북원 영역이 대략 완성되기에 이른다. 이와 함께 토지에 대한 면세를 받게 됨으로서 진상사찰(進上寺刹)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정조 6년(1782년)에 들어와 마곡사는 대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이 다 소실되는 화재를 당한다. 이에 제봉 체규를 화주(化主)로 마곡사의 중창이 시작되며, 정조 9년(1785년)에 이르러 대법당을 개건하기 시작해 정조 12년(1788년) 완성하게 된다. 된다. 한편 정조 14년(1790년)에는 체규의 기도로 정순왕후에게서 원자(元子)가 태어난다. 이것을 인연으로 정조 19(1795년)에 마곡사는 태실(胎室)로 봉해지고 도내수사찰(道內首寺刹)의 직인까지 받게 된다. 이로서 마곡사의 중창불사는 한결 수월해지고 사세(寺勢) 역시 일취월장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련의 중창불사를 통해 대광보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중건 또는 개건됨으로서 현존하는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년)이 쓴 대광보전의 현판과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년)이 쓴 심검당의 현판 등은 이렇듯 왕실의 외호(外護) 속에 사세가 확장된 마곡사의 상황을 대변한다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찰의 모습은 이때의 중건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사찰의 연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몇몇 현판기 등이 있을 뿐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한편 마곡사는 남방화소(南方畵所)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화승(畵僧)을 대대로 배출하였다. 불전에는 화불 대신 뛰어난 산수화가 베풀어져 있으며, 특히 대광보전의 후불벽 뒤편에는 수월백의관음보살도(水月白衣觀音菩薩圖)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많은 화승을 배출한 마곡사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금호(錦湖)-보응(普應)-일섭(日燮)으로 이어지는 화승의 계보를 지니고 있으며, 최근 우리나라 불화의 거장인 송광사의 석정(石鼎) 스님도 마곡사의 일섭 스님에게 불화를 배웠다고 한다.

 
마곡사는 구한말 독립운동가였던 김구 선생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참가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형무소에 수감 중 탈옥하였다. 그 후 마곡사에서 승려로 숨어 지냈다고 하며, 대광보전 앞마당에는 김구가 심었다고 하는 향나무가 있다.
*한국전통사찰정보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