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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향교대성전(長水鄕校大成殿).전북 장수 본문
장수향교대성전(長水鄕校大成殿)
보물 제272호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254-1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장수읍 선창리에 창건되었다가 숙종 12년(168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임진왜란 때는 향교의 노복(奴僕),곧 원노(院奴)였던 정경손(丁敬孫)이 이곳에 침입한 왜군에게 "만약 향교에 들어오려거든 먼저 내 목을 베고 들어오라"고 하여 그 기개에 탄복한 왜군들이 그냥 물러나는 바람에 병화(兵火)를 면하였다는 내력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건물은 기본적으로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이 앞에 있고 문묘(文廟)인 대성전(大成殿)이 뒤에 있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보인다.하지만 보통 명륜당 앞쪽 좌우로 배치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특이하게 그 뒤쪽으로 자리잡고 있는가 하면 동서 양재의 북쪽으로 여느 향교에서는 보기 어려운 사마재(司馬齋).양사재(養士齋) 따위가 부가되어 있으며 대성전 앞에 으레 들어서게 마련인 동무와 서무는 아예 있지도 않아 일반적인 예와 다른 점도 많다.
전하는 말대로 임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아무리 여러 차례 고치고 바꾸었다 하더라도 어딘가 모르게 고격이 풍기련만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그렇다고 정연한 건물 구성과 배치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다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조선 후기 그저 그런 건물들의 어수선한 집합이다.관리도 썩 잘되는 것 같지는 않아 향교로서의 체면치레를 하기에 바쁘다.이런 정도라면 굳이 답사객이 발품을 팔아야 할 까닭이 없겠으나 그런 중에 수수하면서도 요모조모 뜯어볼 만한 점이 적잖은 대성전이 있으니 그냥 지나치기도 서운한 노릇이다
보물 제272호로 지정되어 있는 장수향교 대성전은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정면 3칸 측면 3카의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이다.측면 3칸 가운데 앞쪽 1칸은 퇴칸으로 비워두었다.이 퇴칸은 일종의 전이공간(轉移空間)으로서 일상의 영역과 성역을 구분 혹은 매개하는 구실을 하며 기능적으로는 건물에 깊이감을 자아내어 묘우(廟宇)인 대성전의 권위와 가라앉은 분위기를 유도한다.또 주심포 양식이라고는 해도 기둥은 민흘림에다 공포를 구성하는 첨차,소로,살미첨차들이 모두 다포계 형태를 취하고 있어 고전적인 주심포 양식과는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특히 주두 밑에서 기둥머리에 맞짜인 헛첨차나 초제공의 살미첨차는 끝이 위로 솟구친 앙서형인데
끝부분보다 뿌리 부분이 훨씬 가늘어 매우 나약한 인상을 지울 길 없으며 그 위에 연꽃을 새김질해 얹은 것도 의례적인 장식일 뿐 참신한 맛이 없다.모두 조선 후기,거기서도 시대가 한참 내려서는 시기의 양식이다.
칸마다 기둥머리를 서로 연결하는 평방 위에는 화반이 두 개씩 놓여 주심도리의 하중을 받는 장여를 받치고 있다.그 화반이 꽃술을 물고 피어난 꽃 모양이다.그저 꽃잎 네 장을 되는 대로 새김질한 간결한 것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검박하고 수수한 느낌을 자아낸다
앞뒤의 귀기둥 네 곳에는 이곳 대성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부재가 덧붙어 있다.귀기둥의 중간에 하늘을 향해 팔을 반쯤 벌리듯 가볍게 S곡선을 그리는 부재가 덧대어져 있는데 그 끝부분을 창방 뺄목에 결구하면서 동시에 귀공포의 첨차를 받치도록 고안되었다 얼른 보아서는 귀기둥 밖으로 내민 창방 뺄목이나 공포의 부재들이 처지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구조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지는 모르겠다.어쨌든 여기 대성전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별스런 장치이다
우리 전통건축에서 앞면의 처마와 뒷면의 그것이 서로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장수향교 대성전도 그러하여 앞면은 단면이 둥근 서까래만 한 줄로 놓인 홑처마이다.대개 이렇게 앞뒤 처마의 격식을 달리하는 것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일 텐데 성공적인 경우라면 변화의 묘미를 보여주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칫 궁색함을 드러내기 쉽다.이곳 대성전의 홑처마에도 어딘가 모르게 궁끼가 흐른다고 느끼는 것은 건물의 다른 부분에서 받은 말기적인 인상,혹은 향교 전체에 비낀 퇴락의 그림자가 연상된 까닭은 아닌가 모르겠다.
정면의 벽면 구성은 질서와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중심선을 설정하고 보면 좌우가 딱 들어맞는 대칭을 이루면서도 가운데의 어칸과 좌우 양쪽 협칸의 벽면이 서로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어간은 세로로 사등분하여 가운데는 두짝 밖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좌우로는 중방과 띠장을 두른 다음 그렇게 해서 생겨난 칸칸에 널을 메움으로써 일종의 널벽을 이루었다.양쪽 협칸 또한 세로로 사등분하여 가장 안쪽은 어간처럼 널벽을 치고 다음 칸에는 외짝 밖미닫이 띠살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부분은 중방으로 상하를 구분한 뒤에 위에는 정자살 창문을 두고 아래는 십자로 구분된 칸마다 널을 대어 널벽으로 꾸몄다.그리고 띠살문의 궁판마다 삼태극무늬를 집어넣어 모양을 내었다.이리하여 대성전의 앞면은 문과 창과 널벽이 어울려 규율성과 통일성 속에서도 단조로움을 벗어난 변화의 맛을 보여준다.
장수향교 대성전은 조선조 말기의 양식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건물이다.임진왜란의 전화(戰禍)를 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중건과 중수를 거듭한 까닭으로 풀이된다.우리는 이 건물에서 어떤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찾기에 앞서 한없이 외지고 궁벽했을 이곳에서조차 선현을 받드는 제의가 행해지고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를 먼저 곰곰이 되작여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장수향교 대성전(長水鄕校 大成殿)
보물 제272호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254-1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숙종 12년(1686)때의 일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건물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고 앞면 가운데에는 여닫이문을 달았다. 오른쪽과 왼쪽 칸에도 같은 형식의 문짝 1개씩을 달았는데 그 옆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창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장식구조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러한 장식은 조선 중기 이후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장수 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잘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적은 지방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이다.
*문화재청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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