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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승안사지삼층석탑(昇安寺址三層石塔).경남 함양 본문

☆~ 풍경소리/경 남

함양 승안사지삼층석탑(昇安寺址三層石塔).경남 함양

푸른새벽* 2011. 5. 19. 08:58

 

 

 

 

 

 

 

 

 

 

 

 

 

 

 

 

 

 

 

 

 

 

 

 

 

 

 

 

 

 

 

 

함양 승안사지삼층석탑(昇安寺址三層石塔)


기단과 탑신부 곳곳이 아름답게 조각된 높이 4.3m의 고려 초기의 석탑이다.대체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과 탑신이 균형을 잃었고,각 부분의 결구도 간략화된 반면 장식적 비중이 커졌다.


상층기단의 갑석과 높이가 비슷하여 약간 불안정한 하층기단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조각되었고 그 사이에 안상이 새겨져 있다.상층기단의 형상은 독특하다.각 면을 우주와 탱주로 모각하여 면을 둘로 나누고 그 안에 각 1구의 불상이나 보살상.비천상을 양각하였다.
각 조각들은 차와 꽃을 공양하거나 비파.생황.장구.피리를 연주하는 모습이다.상층기단의 갑석에는 큼직한 복련 연꽃잎이 복성스럽게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은 편이다.탑신부 세 층의 지붕돌은 모두 4단 받침이며,추녀가 직선이고 지붕의 경사가 급하지만 네 귀의 반전이 뚜렷하지는 않다.전체적으로 지붕돌의 훼손 정도가 심하다.1층 몸돌은 양 우주 사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고,2층과 3층 몸돌은 우주만 새겨져 있다.1층 몸돌에 비해 높이가 급격히 낮아지긴 했지만 2층.3층 몸돌은 높이가 거의 비슷하다.상륜부에는 노반.복발.앙화가 남아 있으나,앙화는 윗부분이 거의 파손되었다.


1962년 탑을 현위치로 옮길 때 1층 몸돌에서 지름 12cm,깊이 16cm의 사리공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 「홍치7년(弘治七年)」이란 문서가 나와 성종 25년(1494)에 탑을 옮겨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외에도 면포,명주헝겊,황동제합,비취색 유리사리병,유리구슬,은반지,은조각 들도 발견되었다.승안사지삼층석탑(昇安寺址三層石塔)은 보물 제29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함양 승안사지 삼층석탑(咸陽 昇安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294호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263 


승안사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곳곳에 고려 특유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는데, 위층 기단에는 부처, 보살, 비천(飛天) 등의 모습을 새겨두었다. 또한 위층 기단의 맨 윗돌에는 연꽃조각을 새겨 둘러 놓았는데, 이러한 장식은 보기 드문 모습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고 있다. 2층부터는 몸돌의 크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데, 1층의 몸돌에는 각 면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여 놓았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고,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의 경사는 급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며 네 귀퉁이가 거의 들려있지 않아 둔중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노반(露盤) 위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가 남아있다.


대체로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을 잘 따르고 있다. 기단과 탑신의 비례가 균형을 잃어 잘 다듬은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곳곳에 나타나는 특수한 양식이나 장식에 많은 힘을 기울인 흔적 등 고려 전기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 탑은 원래의 위치에서 두 번 옮겨졌는데, 1962년 탑을 옮길 당시 1층 몸돌에서 발견된 사리장치를 통해 처음 탑을 옮겨 세운 시기가 조선 성종 25년(1494)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