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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남계서원(咸陽 濫溪書院).경남 함양 본문

☆~ 풍경소리/경 남

함양 남계서원(咸陽 濫溪書院).경남 함양

푸른새벽* 2011. 5. 20. 10:54

 

 

 

 

 

 

 

 

 

 

 

 

 

 

 

 

 

 

 

 

 

 

 

 

 

 

 

 

 

 

 

 

 

 

 

 

 

 

 

 

 

 

 

 

함양 남계서원(咸陽 濫溪書院)


서북쪽 저 멀리 남계천 너머로 정여창이 태어나 살던 개평마을이 보이는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정여창을 배향하는 남계서원(濫溪書院)이 자리잡고 있다.


남계서원은 명종 7년(1552)에 사액받았고,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4년(1612)에 재건하였다.풍기 군수 주세붕이 순흥(현재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세운 백운동서원 다음으로 오래된 서원으로,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또한 일찍이 사림의 본바닥으로 자리잡은 영남지방의 많은 서원 가운데서도 '우 함양'의 기틀을 이룬 정여창을 모신 서원이어서 오랜 역사와 더불어 높은 명성을 얻고 있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서 있고,그 뒤로 풍영루가 정문을 겸해 당당히 서 있다.풍영루로 들어서면 앞뜰 귀퉁이의 연못에 핀 연꽃이 어서 오라 반긴다.누각에 오르면 연꽃을 비롯한 갖가지 꽃무늬장식과 그림을 볼 수 있다.정여창은 연꽃을 좋아해서 재실의 이름도 애련헌(愛蓮軒)이라 하였다고 한다.


풍영루 앞 연못 건너 동.서재가 마주보고 있고,명성당이라는 강당의 뒤쪽 언덕에 사당이 마련돼 있다.그 밖에도 전사청과 장판각 등의 건물이 있다.명성당은 큰 배롱나무가 포근히 감싸고 있으며,사당에서는 정여창과 강익.정온 세 분을 모시고 있다.


사당이 있는 높은 언덕에서는 남계서원 전경과 남계천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본래 서원은 산간이나 향촌에 은거하며 학업을 익히기 위한 뜻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건축은 꾸밈이 소박하고 주위의 자연과 잘 어울린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함양 남계서원(咸陽 濫溪書院)


사적 제499호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번지 일원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조선 명종 7년(1552)에 지었다.


명종 21년(1566)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에 나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더하여 모셨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과 정홍서를 모셨다가,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앞쪽 낮은 곳에는 공부하는 강학공간을 두었고 뒤쪽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두어 제향공간을 이룬 전학후문에 배치를 하였다.


누문인 봉수루를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 옆으로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있다. 재 앞에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매헌이 있다. 내삼문 안쪽으로 사당이 있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밖에 전사청과 고직사·묘정비각 등이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 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문화재청자료*

 

정여창(鄭汝昌.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나 그의 증조인 정지의가 처가의 고향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이 그리 드문일은 아니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여러 차례 천거되어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일을 처리함에 공정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14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백욱(佰勖)이었는데,그의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 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 하라" 고 했다고 한다.과연 그의 학덕은 출중하여,우리 나라 성리학사에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5현으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