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경남 함양 본문

☆~ 풍경소리/경 남

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경남 함양

푸른새벽* 2011. 5. 20. 22:53

 

 

 

 

 

 

 

 

 

 

 

 

 

 

 

 

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


신라 말 시인이며 문장가로 우리나라 한문학의 종조로 일컬어지는 고운(孤雲)최치원은 나라가 어지러워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할 것을 깨닫고 외직을 자원,함양태수를 지냈다.학사루(學士樓)라는 이름도 최치원과 인연이 있었던 것을 고려하여 후세 사람들이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꽤 큰 규모의 누각인 학사루는 건축년대를 알 수 없으나 최치원이 함양태수를 지낼 때 이곳에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된다.본래 옛 동헌 자리였던 함양초등학교 뒤뜰에 있던 것을 1979년 현재의 군청 앞 자리로 이전하였다.임진왜란 때 불타 숙종 18년(1692)에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이때 발견되었다.


학사루는 4대사화 중 무오사화와 관련이 깊은 곳으로 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조선 초기 영남 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올랐다.그때 고향이 남원인 유자광(柳子光.?~1512)이 함양에 놀러왔다가 써서 걸어놓은 현판을 보고 "어찌 이 따위가 여기에 시를 걸 수 있는가"라고 호통치며 현판을 떼어 불태워버렸다.이 소식을 들은 유자광은 속으로 분을 삼키고 보복의 그날을 기다렸다.유자광은 부윤 벼슬을 한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 궁궐문을 지키던 일개 갑사(甲士)였으나 이시애의 반란 때 자청하여 싸움터에 나간 뒤부터 출세의 길을 걸었으며 남이장군 등을 역모로 무고해 그 공으로 군(君)에까지 올라 거들먹거린다 하여 눈총을 받던 인물이다.학사루에서 일어난 이 현판사건은 1498년 발생한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0호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1-15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이 누각에 자주 올랐다 하여 학사루라 불리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 옆에 객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 서쪽에는 청상루, 남쪽에는 망악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지방관리가 피로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몸과 마음을 달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숙종 18년(1692)에 다시 지었다고 전하며, 1979년에 지금의 위치인 함양군청 정문 앞에 옮겨 지었다.


김종직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를 내리도록 한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1498)가 일어났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지붕 옆 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