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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가지산 석남사(蔚山 加智山 石南寺).울산광역시 본문

☆~ 절집.절터/울산광역시

울산 가지산 석남사(蔚山 加智山 石南寺).울산광역시

푸른새벽* 2016. 1. 26. 09:41

 

 

 

 

 

 

 

 

 

 

 

 

 

 

 

 

 

 

 

 

 

 

 

 

 

 

 

 

 

 

 

 

 

 

 

 

 

 

 

 

 

 

 

 

 

 

 

 

 

 

 

 

 

 

 

 

 

 

 

 

 

 

 

 

 

 

 

 

 

 

 

 

 

 

울산 가지산 석남사(蔚山 加智山 石南寺)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

 
'영남 알프스'로 불리는 영남 9봉 중에서도 가장 높은 산이 가지산(1,240m)이다.높기도 하지만 나머지 여덟 봉우리들의 중심에 서서 그 들을 거느린 형국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영남 9봉의우두머리격인셈이다.고헌산(1,033m),가지산,운문산이 동서 방향으로 한 줄기로 뻗으면서 경상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는 경계가 되고,가지산에서 남쪽으로 S자 모양을 그리며 세력을 펼친 것이 능동산(983m),천황산,재약산,간월산,신불산,취서산이다.


가지산은 크고 좋은 세 개의 골짜기를 가지고 있는데,북쪽의 쌍폭으로 해서 저 아래 운문사가 자리하고 있는 운문학심이골,구연폭포.호박소.백연사.얼음골로 이어지는 남쪽의 쇠점골,원시림에 가까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는 동쪽의 석남골이 그것이다.


이 석남골의 들머리를 막고 있는 절집이 석남사(石南寺)이다.석남사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소나무.서어나무.굴참나무.가막실나무...... 가슴팍에 이름표 하나씩을 붙이고 친구하자고 손 내미는 나무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다보면 700m 거리지만 생각보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하지만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석남사 침계루에 닿는다.


침계루 앞으로는 짙은 나무 그늘 때문에 덩달아 짙은 초록색으로 흐르는 계곡이 눈부시다.침계루 아래로 난 길을 따라오르면 바로 대웅전 앞이다.대웅전 앞에는 석가탑을 닮은 대석탑이 우뚝 서 있다.대석탑을 둘러싼 건물은 대웅전을 포함해 4동인데,대석탑의 위세에 눌린 듯한 느낌이다.마당이 넓지 않은데 비해 대석탑이 높기 때문이다.대웅전과 강선당 사잇길로 빠져 청화당을 뒤로 돌아 계단으로 오르면 석남사 부도가 있으며,대웅전 왼편의 극락전 영역으로 가면 대석탑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연륜은 훨씬 더 깊어 보이는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대석탑에 견주어 소석탑이라고도 부르는 석남사 삼층석탑(울산시 광역문화재 제5호)이다.이 삼층석탑을 마당 한가운데 두고 극락전과 조사당을 비롯한 건물 5동이 둘러싸고 있다.


인근 경북 청도 운문사,충남 공주 계룡산 동학사와 더불어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름 높은 절집이니,달라도 무엇이 다를까 깊어 주의를 기울이지만,비구와 비구니 수도도량을 비교해보려는 것이 값싼 편견이기 때문 일까,그런 차별점이 쉬 보이지 않는다.다만 절집 건물이 약 30동 규모로 작지 않은데도 각각의 건물 규모가 크지 않고 경내 공간도 넓지 않은 데다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이 정도이고 보니 관람객으로서 절에서 지체하게 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편이다.그래서 침계루 안 경내 공간보다 침계루 밖 계곡과 숲에서 더 오래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석남사가 창건된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신라 헌덕왕 16년(824) 도의선사(道義禪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온다.도의선사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로 대표되는 중국의 선불교,그중에서도 돌연적인 깨달음(頓悟)을 강조하는 남종선을 서당 지장(西堂 智藏 ,735~814) 에게서 직접 배워 신라에 처음 소개한 고승이다.서당 지장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이후로는 "강서(江西,서당선사를 지칭함)의 선맥이 모두 동국승(東國僧)에 속하게 되었구나"하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중국에서 37년 수행 정진한 끝에 821년 신라로 돌아오지만 화엄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신라에서는 선불교의 이념을 급진적이고 불온하다 하여 쉽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때가 무르익지 않음을 느낀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40년간 제자를 기르며 지내다 입적한다.그의 제자가 염거화상(廉巨和尙, ?∼844)이다.염거화상 역시 공식적인 선문(禪門)을 열지 못하고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 804~880)에게 법을 전하는데,이 보조선사에 이르러서야 최초의 선문인 가지산문이 열리게 된다.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가 그것이다.전해지는 대로라면 석남사는 신라로 돌아온 도의가 진전사로 가기 직전에 창건한 셈이 된다.


이후 석남사에 대한 내력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숙종 42년(1716)에 씌어진 「석남사적」에서다.이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불타 빈터만 남은 것을 현종 7년(1666)에 대웅전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석남사는 이후 순조 3년(1803),1912년, 근래까지도 중수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앞의 대석탑은 1973년에 세워진 것인데,그 연원은 도의선사가 세웠다는 15층 석탑에까지 이른다.이 15층 대석탑이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탑의 일부 부재만 남아 있던 것을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봉안할 곳을 물색하면서 비록 3층으로 축소됐지만 개축하였다는 것이다.그 높이가 11m에 이른다.


석가삼존불자상이 모셔진 대웅전에서는 영조 1년(1725)임을 말해주는 '雍正三年己巳'(옹정삼년기사) 라는 명문이 새겨진 암막새가 나온 바 있다.영조 연간에 대웅전이 중건되었다는 이야기이다.석가삼존불좌상 뒤쪽에 걸린 후불탱화는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는 않지만,영조 12년(1736) 진경시대 절정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기품이 있다.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 좌상 좌우에 가섭,아난 제자가 서 있고 주위로 문수,보현,관음,세지 등 8대 보살이 둘러 있으며,8대 보살 아래 좌우에 사천왕이 둘씩,그리고 나머지 8대 제자가 8대 보살 뒤쪽으로 배열된 영산회상도이다.대웅전 측면 벽에 걸려 있는 철종 14년(1863) 작품 신중탱도 눈길을 끌며,석가삼존불좌상을 모신 수미단의 꽃 장식도 화려하다.


대석탑에 대웅전 앞 자리를 내주고 극락전 앞마당으로 옮겨진 삼층석탑은 높이는 2.5m로 대석탑에 크기로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연륜은 월등하게 깊다.이중기단의 삼층석탑으로 규모가 작아지고 지붕돌 층급받침이 4단,상층기단의 버팀기둥이 하나로 줄어든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통일신라 하대 석남사가 창건되면서 함께 조성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하층기단은 전체 탑의 높이에 비해 비교적 두툼하게 느껴지며,면석에는 귀기둥이나 버팀기둥 없이 안상만 면마다 하나씩 조각되어 있다.덮개돌에는 상층기단 면석을 받치기 위한 굄을 3단 두었는데 가운데 단은 특별히 모를 죽여 둥글게 만들었다.상층기단의 덮개돌 그리고 각 지붕돌에도 몸돌을 받치기 위한 굄을 두었으며 상륜부에 노반,복발,앙화,보개 등이 남아 있다.


극락전에는 석조아미타불이 모셔져 있으며,극락전 옆의 조사전에는 중앙에 도의선사의 진영이 모셔지고,좌우로 순조.철종 연간에 활동하던 선사 여덟 분의 진영이 모셔진 것을 보면 이 시기에 석남사가 선풍을 크게 떨쳤던 듯싶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