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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경기 구리 본문

☆~ 바람소리/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경기 구리

푸른새벽* 2016. 3. 8. 00:02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

 

보물  제1743호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으로 현재 동구릉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목릉의 능역은 1600년(선조 33)에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이 먼저 조성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에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의 능인 목릉을 건원릉의 서편에 조성되었는데, 능에 물이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상소에 따라 1630년(인조 8)에 현 위치로 천릉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그 후 1632년(인조 10)에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성하여 현재와 같은 능역을 이루게 되었다.


현존하는 정자각은 1608년 선조의 능에 건립되었던 것을 1630년 천장과 더불어 이건(移建)하고, 전에 있던 의인왕후 유릉의 정자각과 합하여 설치한 것이다.이건 후 여러 차례 건물 수리가 있었는데, 특히 1745년(영조21), 1749년(영조 25), 1769년(영조 45) 세 차례에 걸쳐 벌레로 인한 기둥 교체가 있었다.


목릉 정자각은 정전이 3칸, 배위청이 2칸인 5칸 제도의 정자각이다. 가구는 정전이 5량가, 배위청이 3량가로 구성되었다. 대개의 정자각 정전의 측벽은 가운데 기둥을 중심으로 맞보를 걸어 결구하는데, 목릉 정자각은 고주 둘을 세워 종보를 직접 받도록 한 것이 특이하다.포작은 다포 형식으로 정전 쪽은 내외 1출목으로 포를 짜고, 배위청 쪽은 출목 없이 포를 구성했다. 간포(間包)는 각 칸에 하나씩만 두었다. 정전부의 포의 살미는 일제공을 앙서형으로, 이제공을 삼분두형으로 조각하여 그다지 화려해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17세기 초에 재건된 문묘 대성전 포의 구성과 유사해서, 이 시기 다포형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사례가 된다.


현재 목릉 정자각은 1630년(인조 8) 이건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왕릉 정자각 가운데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이다. 살미의 형태나 구조가 장식화 되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