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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경기 구리 본문

☆~ 바람소리/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경기 구리

푸른새벽* 2016. 3. 10. 00:09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


보물  제1742호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으로 동구릉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이다. 1674년(숙종 즉위)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였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84년(숙종 10)에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능을 왕릉 옆에 나란히 조성하였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능역 남쪽이 저습하여 진입로 등이 쉽게 물난리를 겪는 등 진입부분이 지형적으로 취약하지만 능역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숭릉 정자각은 1674년(숙종 즉위)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건립되었다. 건립 이후 정자각은 몇 차례 작은 수리를 거쳤으며, 1828년(순조 28)에는 정자각 월대를 개축했다는 기록이 순조실록에 보이고, 1899년(광무 3)에는 배위청의 기둥이 기울어져 보수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숭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42기 중 현재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평면으로 구성된 8칸 제도의 정자각이다. 여주 효종의 영릉(寧陵)을 전례로 하여 건립 되었다. 8칸 정자각은 광릉과 영릉(英陵)에도 건립되었지만, 효종 영릉과 현종 숭릉의 정자각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673년과 1674년은 영릉 천봉겸 인선왕후의 국장, 현종의 국장이 연달아 발생한 때다.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왕릉의 제도를 축소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왕릉의 임시 빈전인 영악전(靈幄殿)이 만들지 않게 되었다. 영악전은 궁궐 빈전의 재궁(梓宮, 왕과 왕비의 관)을 옮겨와 모시는 곳으로 건물의 크기는 재궁을 넣어두는 찬궁(?宮)과 의례를 위한 각종 시설의 배치에 영향을 받아 정자각보다 크게 만들어지는 것이 예였다. 영악전을 짓지 않은 채 조성된 영릉과 숭릉의 정자각은 임시 빈전의 역할도 해야 했기 때문에 정전의 전후 기둥간격을 이전보다 넓히고, 8칸제도로 확대하여 격식을 더했다.


현존하는 8칸 제도의 정자각은 숭릉을 비롯하여 익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이 있으며, 이 중 숭릉을 제외한 나머지 정자각은 모두 맞배지붕의 형태이다. 산릉도감의궤 등 문헌에 의하면 영릉(英陵), 강릉(康陵), 장릉(長陵), 영릉(寧陵)의 정자각이 팔작지붕이었으나, 후대에 모두 맞배지붕으로 교체되어 현재는 숭릉을 제외한 모든 정자각이 맞배지붕이다.


숭릉 정자각의 포작은 정전 쪽이 일출목 이익공이고, 배위청 쪽이 출목 없는 이익공이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는 외관을 갖추고 있다.숭릉 정자각은 소규모 수리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 중건의 기록은 없다. 조성 당시 작성된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에 기재된 정자각 건립내용과 현재의 모습이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1674년에 창건된 이래 규모나 지붕 형식이 크게 변형되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숭릉 정자각은 변화된 17세기의 왕릉제도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