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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장릉(寧越 莊陵).강원 영월 본문

☆~ 바람소리/조선왕릉

영월 장릉(寧越 莊陵).강원 영월

푸른새벽* 2017. 6. 30. 16:06




































































































































































영월 장릉(寧越 莊陵)


단종이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하였으나 주검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모두들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이때 당시 영월 호장(戶長)이었던 엄홍도가 나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산속으로 도망 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떳떳이 시신을 거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좋은 터를 고를 겨를이 없었다.쫒기는 와중에 마침 노루가 앉았던 터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기에 엉겁결에 땅을 파고 시신을 묻었을 뿐인데,풍수지리가들이 마에 의하면 단종의 묘가 자리 잡은 곳은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단종의 무덤은 중종 11년(1517) 임금의 명으로 찾게 될 때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숙종 때인 1698년 비로소 왕의 대접을 받게 되자,그제야 '장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숙종은 어제시(御製詩.왕이 직접 지은 시)를 많이 남긴 왕으로 유명한데,단종을 복권시키고 그 묘를 능으로 추봉한 뒤 단종에 관한 시도 여러 편 읊었다.


그 뒤 단종에 대한 엄홍도의 높은 충절이 인정되어 그의 자손들에게 벼슬자리가 내려진 것은 물론,비록 죽은 뒤이지만 엄홍도에게도 공조참판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해마다 한식날에 단종에게 제시를 지내는데,1967년부터는 단종제로 이름이 바뀌어서 이 지방이 향토문화제가 되었다.단종제 기간은 영월읍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때이다.


장릉은 조선 시대의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 몇 가지 특징이 있다.우선 문화재로서 제향이 거행되는 조선 시대 왕릉은 장릉뿐이다.둘째,조선 시대 왕릉은 서울에서 100이를 벗어나지 않는 곳에 두는 것이 관례인데,그 관례를 깬 유일한 왕릉이다.셋째,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산줄기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넷째,규모는 크지 않으나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경기도 여주의 영릉(세종대왕릉)과 더불어 으뜸으로 꼽힌다.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된 장릉은 영월읍 영흥리 동을지산 기슭에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묘는 서울 쪽,곧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묘를 둘러싼 소나무는 모두 묘를 향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진 것이 많아 더 애틋해 보인다.묘 앞에는 칼 든 자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므로 무신석 없이 문신석만 서 있는데,그 표정도 구슬프다.묘 뒤쪽으로는 반달 모야으로 담장을 둘렀다.진흙을 발라가며 전(塼,흙을 구워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를 얹은 그 정연한 모습하며 기와 아래 바깥쪽 담에 화강암으로 별을 수놓듯 장식한 꽃담이 퍽 아름답다,최근 시멘트를 발라 복수 해놓은 담장 일부분과 옛 담장이 나란히 잇닿아 있어 담장에 쏟은 예와 오늘의 마음씀새가 미감(美感)으로 비교된다.


그밖에 박충원 정여각,엄홍도 정여각,단종으로 인하여 순절하거나 희생된 충신.종친.시종 들이 위패를 공동으로 모신 충신각,제사 지낼 때 제물을 자려놓는 배식단,제사 지낼 때 더 물이 풍부해지는 우물 영천,제사를 지내는 중심 건물인 정자각,단종의 생애를 기록한 단종비각 등이 장릉 입구에서부터 왕릉이 있는 곳까지 차례로 늘어서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 중에서



영월 장릉(寧越 莊陵)


사적  제196호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흥리)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이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