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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미(山彌) 본문

☆~ 바람소리/박물관

살미(山彌)

푸른새벽* 2017. 3. 4. 19:45
























살미(山彌)


살미는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까지 살미는 첨차와 함께 그 끝을 직절(直切)하고 직절한 아래 부분을 곡선으로 깎아 만든 ‘교두(翹頭)형’이 일반적이었으나 우리나라 삼국시대 건축의 영향을 받은 일본 나라 호류지[法隆寺]의 금당과 오중탑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구름 형태로 조각한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살미의 형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봉정사 극락전에서 살미와 첨차는 모두 연화두(蓮花頭)형으로 초각되어 있다. 그리고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살미는 연화두형과 함께 쇠서(牛舌)형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다포식 공포가 많이 채택되면서 쇠서형 살미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조선시대 건축에서 살미의 외단부 쇠서형은 쇠서가 위쪽을 향해 올라간 앙서(仰舌)형과 아래로 향해 뻗은 수서(垂舌)형 및 구름이나 봉취(鳳嘴), 천계(天鷄)형 등을 초각한 것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살미 외단의 다양한 초각 형태는 조선시대 후기 다포식 건축의 공포에서는 일정한 법식에 따라 적용되었다. 즉 여러 단의 살미 중 가장 위에 위치한 살미는 구름이나 봉취, 천계형으로 초각하고, 그 바로 아랫단의 것은 수서형, 그리고 나머지 아래에 위치한 살미는 모두 앙서형으로 만드는 법식화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후기의 영조의궤에서는 앙서형의 살미를 제공(齊工), 수서형의 살미를 익공(翼工)이라 불렀으며, 끝을 구름무늬로 조각한 것을 운공(雲工)이라 불렀다. 또한 이러한 살미의 형태에 따른 구분과 함께 살미의 위치에 따라 살미를 초제공, 이제공, 삼제공, 사익공, 오운공과 같은 식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공포는 역삼각형의 단면 구조를 지니며, 한 단 올라갈 때 한 단씩 건물 내외로 빠져 나와 건물의 높이를 높여주는 동시에 외목도리를 받쳐줌으로써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러한 공포 구조에서 살미는 보 방향으로 중첩해 놓인 부재로 건물의 높이를 높여줌과 동시에 출목(出目)을 형성하도록 하는 공포를 구성하는 핵심 부재이다.


살미는 첨차와 직각으로 반턱맞춤으로 결구되는데, 그 구조역학적인 특성으로 인해 첨차를 아래에 놓고 살미를 위에 올려놓는다. 즉 살미를 엎을장, 첨차를 받을장으로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살미는 첨차와 함께 주두와 소로 윗면에 만든 ‘갈’이라고 하는 홈에 끼워 놓는다.


살미는 조선시대의 영조의궤에 ‘沙乙尾’ 또는 ‘山彌’라고 표기되어 있다. 모두 이두식 표기로써 중국이나 일본 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건축용어이다. '沙乙尾'라는 표기는 1633년에 간행된 『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 에서만 보이며, 이후의 의궤에서는 모두 '山彌'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은 경복궁 중건 공사에 사용된 목부재로 2000~20003년에 진행된 근정전 보수 공사 당시 수습된 것이다.건물 상부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기둥 위에 설치하고 아름답게 조각하거나 단청하여 건물을 장엄하는 기능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