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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불암산 불암사(南楊州 佛巖山 佛巖寺).경기 남양주 본문

☆~ 절집.절터/경 기

남양주 불암산 불암사(南楊州 佛巖山 佛巖寺).경기 남양주

푸른새벽* 2019. 7. 5. 22:35

















































































































































남양주 불암사(南楊州 佛巖寺)


경기도 남양주시 불암산로 190 (별내동) 


불암사(佛巖寺)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 797번지 불암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양주군 불우(佛宇)조에 보면 불암사 주변의 경치를 읊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하고 있다.


“우리 집 서쪽 영(嶺)에 절이 있는데, 여러 벗들과 손잡고 함께 놀았다. 달 숲에 송뢰(松瀨)소리, 두릉(杜陵)이 묵었고[宿], 늙은 나무 굽은 바위 이백(李白)이 썼다. 객자(客子)가 안 오니 원숭이 서럽고, 노승(老僧)이 잠들려니 산새가 운다. 아득한 띠끌 세상 어느 곳인가. 흰 구름 땅에 가득, 길을 몰라라.”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시(詩)이지만 옮겨 적어 몇 백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불암사 주변과 비교를 해 본다. 그리고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세월이 흐르고 주변의 지세가 많이 변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곳은 이름모를 옛 사람이 시로 전한 전경이 가득하다. 같은 불암산에 자리한 석천암이나 천보사는 하늘을 찌를 듯, 대지를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뒤로 하고 있다. 그러나 불암사는 바위의 웅장함이나 시원한 전경이 있지는 않다. 다만 울창한 숲 사이로 노승의 풍모(風貌)를 닮은 굽은 소나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을 이고 부처님을 가슴에 품고 있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러한 불암사는 조선 세조 때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원찰(願刹)을 정할 때 서 진관(진관사), 남 삼막(삼막사), 북 승가(승가사)와 함께 동 불암(불암사)으로 꼽혔던 곳이다. 그만큼 불암사가 호국안민(護國安民)의 기도도량으로서의 사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불암사의 자랑거리로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제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석씨원류응화사적책판(釋氏源流應化事蹟冊板)에 있다.



이 책판(冊板)은 1631년(인조 9)에 정두경(鄭斗卿)이 명(明)나라에 사절로 갔다가 귀국할 때 얻어 온 책을 바탕으로 하여 1673년에 승려 지십(智什)이 불암사(佛巖寺)에서 다시 간행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 이 책판은 중국의 책 목록에도 나와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만 유일하게 전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모습을 닮은 산 아래 자리하여 이름마저 '부처바위(佛巖)'라고 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까지 모셔놓은 불암사는 그야말로 부처님의 도량이다. 이러한 도량에서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음을 들으며, 기도를 통해 매일 정진하고 있다.
*대한민국구석구석자료*




남양주 불암사(南楊州 佛巖寺)


경기도 남양주시 불암산로 190 불암사


불암사(佛巖寺)는 별내면 화접리 불암동 천보산 아래에 위치한 봉선사의 말사이다. 골짜기의 풍광과 함께 절 뒤쪽 기슭의 불암봉 아래에는 폭포가 있는데 떨어지는 폭포물이 햇빛에 비치면 마치 수많은 구슬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한다. 이처럼 뛰어난 경관으로 불암사는 경기도에서 서쪽의 진관사(津寬寺), 남쪽의 삼막사(三幕寺), 북쪽의 승가사(僧伽寺)와 함께 명승지로 꼽힌다.


   『봉선사본말사지』 「불암사」조에는 지증대사(智證大師 : 824∼882)가 신라시대에 창건하고 불암사로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증대사의 속성은 김씨이고, 호는 도헌(道憲), 자는 지선(智詵), 탑호(塔號)는 적조(寂照)이다. 고려 초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 : 827∼898)가 중건하였으며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무학대사가 폐허화된 것을 중창했다고 한다. 이 때까지의 불암사에 관한 기록은 지극히 소략하여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계속되는 중건과 함께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천보산불암사사적비(天寶山佛巖寺事蹟碑)」를 지은 이덕수(李德壽)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이르러 천보산 남쪽 한자락에 세조 · 성종의 왕릉이 자리하면서 절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원찰이다. 이 때 일현보감(一玄寶鑑)이라는 스님이 사세확장의 서원을 세우고 불상을 개금하고 범패에 이용되는 기물에서부터 요사·창고·부엌에 이르기까지 마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스님들이 중건의 뜻을 모아 시주를 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거사 각신(覺信)·정인(淨仁)이 발원하여 시주금을 모아 조석으로 부처님께 재(齋)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는 서악명관(瑞岳明瓘)화상이 선당(禪堂)을 창건하였으며, 1782년(정조 6)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과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수하고 제월루(霽月樓)를 고쳐 지었다.


  「불암사중수기(佛巖寺重修記)」는 이 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현보감 등이 절 안의 전각들을 두루 갖추어 놓았지만 근래에는 절에 주지가 없고 점차 황폐해졌으며 대웅전과 요사에는 비바람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에 서악당 명관이 호남에서 옮겨와 분연히 일어나 분주히 뛰어다니더니 병신년에는 마침내 선당을 건립하였고, 6년 뒤인 임인년에는 서울의 여러 단월들의 시주로 보광전(普光殿)과 극락전을 건립하였다. 이어서 제월루각을 옮겨서 건립하였다. 누각에 단청을 더해 절의 전각들이 모두 새로워졌다. 종이 파괴되어 소리가 나지 않던 것을 고쳐서 새로 만들었다. 서악스님이 다행히 상궁 계월(桂月)과 신찰 (信察)을 만나 이루어진 것이다.


  즉, 세월이 흐르면서 쇠퇴해가는 절을 보고 서악화상은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시주금을 모아 보광전과 극락보전을 건립하고 제월루를 옮겨지었다. 더욱이 파손되어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절 한쪽에서 먼지만 쌓인 종을 새로 만들어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쳤던 것이다. 그 후 불암사는 1844년(헌종 10) 보봉대사(寶峰大師)가 대시주의 도움으로 전각과 요사를 중수했고, 누각에 단청을 하였다. 또한 1853년(철종 4)에는 보성(寶城)스님이 제월루를 중수하였고, 춘봉화상(春峰和尙)이 향로전(香爐殿)을 다시 지었으며, 사찰의 스님들이 의논하여 누각을 보수하니 예전과 같이 찬란하였다고 한다.


  또한 1855년에는 혜월(慧月)·보성스님이 전각과 요사채를 중수하였다. 수락산에서 옮겨 온 혜월스님이 보성과 함께 조정의 내탕금을 하사받아 중수하였으며, 춘봉·환응(喚應)·성담(性潭)·한경(漢景)·춘파(春坡)·관해(觀海) 등 여러 선사가 사재를 출자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1910년에는 풍천 임씨(豊川 任氏)의 시주로 동축당(東竺堂)·독성각·산신각이 건립되었으며, 1959년에는 만허(滿虛)스님이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남양주시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