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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다층전탑(驪州 神勒寺多層塼塔).경기 여주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여주 신륵사다층전탑(驪州 神勒寺多層塼塔).경기 여주

푸른새벽* 2023. 10. 8. 07:36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여주 신륵사다층전탑(驪州 神勒寺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경기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282 신륵사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다층 불탑. 전탑. 보물.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9.4m. 현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이다. 지대석 위에 화강석의 장대석으로 7층의 기단을 쌓고, 4단의 층단을 만들어 밑에서부터 3·5·6·7단째에서 각각 체감되면서 층단이 되었고 화강석을 사용한 점은 기단의 전체 형태와 아울러 이색적이다.

기단에 사용한 장대석 가운데에서 최하단의 중간 돌과 제2단의 아래 돌은 다른 부재보다 높은 돌을 쓴 점이 주목된다. 기단 위에 1단의 화강석 옥신(屋身)받침을 마련하였음은 신라시대 전탑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이 받침 위에 위로 갈수록 체감된 형태로 3단의 받침을 전(塼:벽돌)으로 만든 다음 탑신부를 축조하였다.

탑신부는 전으로 6층을 축조하였는데, 옥신 높이의 체감은 거의 없고 6층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으며 너비의 체감도 비율이 일정하지 않아 기형적으로 고준해 보인다. 옥개(屋蓋)도 너비가 매우 좁아서 전탑으로서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다.

각 층의 옥개받침은 3층까지는 2단이고 4층 이상은 1단이며, 낙수면의 층단은 초층은 4단이고 2층 이상은 2단씩으로 되어 있는 점은 이 전탑이 기형적으로 된 요인의 하나이다.

더욱이,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 데 비하여,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넓게 떼어서 면토(面土)를 발랐다. 벽돌에는 둘레에 연주문(連珠文)을 두르고 그 안에 당초문(唐草文)을 돋을새김한 반원문(半圓文)이 있는 것도 있으나 배열방법은 무질서하다.

상륜부(相輪部)는 6층 옥개 위에 전으로 만든 노반(露盤: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이 있고, 그 위에 화강석제의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 등이 얹혀 있다.

탑 북쪽에는 이 탑의 수리비가 있는데, ‘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입)’이라고 건립 연대가 명기되어 있어 1726년(영조 2)의 작품임을 알겠고, 이 탑도 이 때 지금의 형태로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전탑의 초창(初?)연대를 신라시대로 보아왔으나 벽돌의 문양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다.

또한, 이 전탑의 건립위치로서 바로 아래에 한강이 굽어보이는 암석 위를 택하였음은 신라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걸쳐 유행하던 특수한 점지(占地) 경향의 유풍이라 하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경기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282 신륵사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