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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용화사 석불상군(淸州龍華寺石佛像群).충북 청주 본문

☆~ 풍경소리/충 북

청주용화사 석불상군(淸州龍華寺石佛像群).충북 청주

푸른새벽* 2023. 12. 10. 11:50

 

 

 

 

 

 

 

 

 

 

 

 

 

 

 

 

 

 

 

 

 

 

 

 

 

 

 

 

 

 

 

 

 

 

 

 

 

 

 

 


청주용화사 석불상군(淸州龍華寺石佛像群)

보물 제985호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216-1 용화사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의 용화사 미륵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7구의 불상.

용화사의 미륵보전 안에 봉안된 이 석불상군은 모두 7구의 석불로 미륵칠체불 또는 칠존미륵불로 불려지기도 하나 본래는 운천동·사직동 일대에 방치되어 있었던 석불들을 1902년(광무 6)에 용화사(龍華寺)를 창건하면서 옮기어 봉안한 것이다. 따라서 칠존불로 동시에 조성된 것은 아니며 규모와 형태, 조성연대가 각기 다르다.

석불들은 여래입상 4구, 여래좌상 1구, 보살좌상 1구, 그리고 유마상으로 보이는 1구 등 모두 7구인데, 크기나 도상적으로 전혀 상호연관을 지을 수 없다. 거불인 3구의 여래입상부터 살펴보면 머리는 모두 나발(螺髮)이고 육계(肉?)가 있으며 1구는 육계가 높아서 마치 보살의 보계처럼 보인다. 수인은 2구는 시무외 여원인을 취하고 있고, 1구는 여래상이면서도 특이하게 정병과 보주를 각기 양손에 들고 있다. 이들 중 가슴의 대의 주름이 꽃잎처럼 표현된 불상의 뒷면에는 승상(僧像)이 부조되어 숨어 있는데, 조각이 이 상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4구의 불상들은 크기가 작은 불·보살상들로 표현이 정확하지 않으며, 특히 머리에 두건을 쓰고 책상에 한 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불상은 유마상으로 추정되어 특이하다. 불상의 크기는 모두 다른데 가장 큰 서쪽에서 세 번째 불상은 높이가 5.5m에 이른다.

이 석불들이 방치되었던 운천동사지(雲泉洞寺址),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 등 통일신라 이래 고려의 고사지들이 밀집된 곳으로 일대가 청주지역의 고대 불교 융성지였음을 알려준다. 대체로 고려 이후 청주지역의 토착적 불교신앙과 미술을 반영하고 있는 불상들로 추정되나 이후 많은 후보가 있었던 듯 도상이나 조각의 표현 면에서 많은 혼란을 보인다. 

이 석불상군은 1976년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가 중요성이 인정되어 1989년 4월 10일에 보물 제985호로 승격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자료*



청주용화사 석불상군(淸州龍華寺石佛像群)

청주 시내 무심천 서쪽에 자리잡은 용화사에는 이례적으로 불상 일곱 구가 모여 있다.모두 고려시대의 불상이며 높이 1.4m 되는 좌상 한구를 빼고는 모두 최고 5.5m 에 이르기까지 장륙상 또는 그 이상의 거상들이다.무심천 둑에서 범종루 아래 용화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충청북도 불교회관이 있고 오른쪽에 용화보전이 있는데 불상들은 그 안에 모셔져 있다.

용화사 법당 상량문에는 이 일곱 불상의 내력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광무 5년(조선 고종 38,1901) 어느날 궁궐에서 잠자던 엄비가 꿈을 꾸었다.청주에서 석불 일곱 구가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는 꿈이었다.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과연 청주 서북방의 황막한 개천가에 석불들이 있었다.엄비는 군수 이희복에게 절을 짓도록 했으며 이희복은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를 헐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절을 짓고 일곱 '미륵불'을 모셨다.이때가 광무 6년(1902) 이었다.절 이름을 용화사라 한 것은 미륵부처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설법하여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창건 당시 용화사의 법당 규모는 15칸 이었다.1907년에 재판소 지부로 잠시 사용된 적이 있으며 한국전쟁 때 법당이 불에 타자 석불들은 다시 이슬을 맞게 되었는데 1972년 신도들이 모금으로 다시 미륵보전을 세웠다.1993년에 그 법당을 헐고 지금이 2층 법당을 크게 지었다.

용화사가 있는 곳은 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옛 절터가 많은 곳이다.멀지 않은 곳에 고려시대 인쇄문화의 본거지였던 흥덕사터가 있고 이웃한 운천동에도 절터가 있으며 그밖에도 미처 조사되지 않은 절터들이 흩어져 있다.용화사의 일곱 석불은 흔히 철존석불로 불리지만 한꺼번에 조성된 것이 아니고 이 옛 절터들에 남아 있던 석불을 한데 모은 것으로 보인다.인근 지역의 노인들 사이에는 자기 아버지가 여기저기 흩어진 석불들을 용화사로 옮기는 데 참여했다는 분들도 있다.그전에 어떤 석불은 축대처럼 방치되어서 거기 걸터앉아 낚시를 했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석불은 갑오농민전쟁 때 관군의 총탄을 피하는 방어물이 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불상들은 대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규모는 5.5m에서 3.2m,1.9m.1.4m로 다야하고 좌상과 입상이 섞여 있다.시무외여원인을 취하거나 보병을 들고 있는 등 손의 자세도 각각이다.모두  두 어깨를 감싼 법의를 입고 있으나 옷자락의 모양과 두께,주름을 조각한 수법과 솜씨가 조금씩 다르다.옮겨다니던 중 모두 원래의 대좌를 잃어버리고 지금은 새로 만든 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다.그 전에는 아랫도리가 시멘트로 만든 임시 대좌 안에 묻혀 있기도 했고 손이나 들고 있는 보병,몸 아랫부분 등을 부분적으로 보수해 붙인 불상도 있다.

가장 키가 큰 여래입상은 나발이 굵게 표현된 머리에 육계가 유난히 우뚝하다.이마는 좁은 편이며 백호가 있고 얼굴은 긴 편이다.반개한 두 눈이 길고 코가 크며 입은 작다.규모도 규모지만,군턱이 있는 원만한 얼굴과 이목구비,살집이 많은 몸,유난히 큰 두 손이 자신감에 찬 당당한 느낌을 준다.두 귀는 두툼하고 길며 목에는 삼도가 있다.법의는 두 어깨를 감싸고 가슴이 트여 있으며 팔목에서 평행 주름을 지으며 흘러내리고 배 아래쪽에서 큼직한 U자를 여러겹 그리며 흘렀다.옷주름은 불사으이 뒷면에도 이어져 있다.가슴께를 가로지른 승각기(윗내의) 옷단에는 둥근 무늬가 양각되었다.무늬진 옷단 아래 가슴에 卍 자가 새겨졌고 배 앞쪽에 군의를 묶은 매듭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시무외인을 ,왼손은 배 앞에서 여원인을 지었는데 두 손 다 둘째손가락만을 펴고 나머지는 굽혔다.크기로 불상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려는 듯 거대한규모,두툼한 기량감이 두드러지고 굴곡이  거의 없는 몸집과 얼굴에 실린 표정,탄력이 줄어든 대신 힘을 느끼게 하는 옷주름 표현,가슴에 새겨진 卍자 등 구석구석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두번째로 큰 불상 역시 입상이다.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알맞은 크기로 솟았고 앞에 든 입상보다 얼굴이 둥글고 두 볼에 살이 쪘으며 눈.코.입도 알맞게 배치되었다.미간에 백호가 있고 두 눈은 역시 반개했으며 눈두덩이 부숭하다.두 귀가 길어서 어깨에 닿았으며 목에 삼도가 있다.두 어깨를 모두 감싼 법의는 목 둘레에서 옷깃이 뒤집혔으며 가슴이 막혀 있다.옷주름은 가슴 아래로부터 나이테처럼 물결지으며 아래로 흘러내린다.이처럼 구불구불한 선은 충청북도나 경기도 일대의 불상에서 간혹 볼 수 있는 모습이다.왼손은 몸 옆으로 내렸고 오른손은 어깨쯤에 둘어 손가락을 굽힌 채 손바닥을 보였다.이 불상 역시 몸의 양감이 풍부하지는 않으나 앞의 불상에 비하면 허리나 팔에 굴곡이 있다.

한편 이 불상 뒷면에는 높이 3m가 넘는 거대한 나한상이 양각되어 눈길을 끈다.이 나한상은 나중에 새겨진 것으로 여겨져왔으나 불상이 조성될 때 함께 새겨졌다는 주장도 있다.나한상은 삭발머리에 원만한 얼굴이며 반달꼴 눈썹에 눈두덩은 부숭하고 눈은 반개하여 일직선이다.콧망울 양쪽에서 입가로 주름이 깊게 패여 고행하는 수도자상으로 보이며 뒤 귀는 짧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왼손은 배 앞에 들어 향로를 받들었고 오른손은 가슴에서 엄지만 펴고 네 손가락을 꼬부려 향로 윗부분을 감쌌다.굵다란 옷주름은 팔굽 아래로부터 좌우대칭을 이루며 흘러내렸고,머리에서 어깨까지는 비교적 높게 새겨졌으나 점차 낮아져서 아래쪽은 선각에 그쳤다.

세번째로 큰 불상은 풍만하고 중후한 얼굴에 건장한 체구를 지녔는데 아랫부분은 원형이 아니다.귀와 보병을 든 오른손,약합 같은 것을 받쳐든 왼손 등 다른 부분도 보수된 곳이 많다.두 어깨를 감싼불의를 걸쳤는데 가슴을 반쯤 드러냈으며 옷주름이 굵게 표현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는 결가부좌한 보살상이 있다.머리에 꽃무늬 있는 보관을 썼고 이마에 백호가 두드러져 있으며 얼굴은 긴 편이다.귀를 비롯하여 얼굴을 부분적으로 보수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어깨가 좁아 움츠린 듯하며 무릎도 좁다.가슴 앞에 들어 손바닥을 보인 왼손과 무릎 위에 내려놓은 오른손도 보수된 것이다.

나머지 셋은 두건을 쓰고 두터운 소을 걸친 좌상,시무외여원인을 지은 입상,결가부자하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좌상이다.

용화사에 모셔진 일곱 불상은 조성양식이나 수법에서 고려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보물 제98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청주용화사 석불상군(淸州龍華寺石佛像群)

보물 제985호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216-1 용화사  

용화사 법당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이곳은 1902년에 만든 절로, 엄비(嚴妃)의 꿈에 청주에서 7구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사람을 보내어 청주 서북쪽의 냇가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그리하여 용화사를 세우고 미륵보전에 7구의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 이들 중 왼쪽 3번째의 불상은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크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 卍 자가 양각되어 있다. 왼쪽 5번째 불상은 독특한 옷주름이 있고,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羅漢像)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머리 부분과 양 손을 나중에 보수한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한 것이 특징이다. 

7구의 불상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