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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안심사 대웅전( 安心寺 大雄殿).충북 청주 본문

☆~ 풍경소리/충 북

청주 안심사 대웅전( 安心寺 大雄殿).충북 청주

푸른새벽* 2024. 1. 27. 14:35

 

 

 

 

 

 

 

 

 

 

 

 

 

 

 

 

 

 

 

 

 

 

 

 

 

 

 

 

 

 

 

 

 

 

 

 

 

 

 

 

 

 

 

 

 

 

 

 

 

청주 안심사 대웅전(安心寺 大雄殿)

보물 제664호
충북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사동리 271 

안심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인 다포집이다.이 불전은 어딘가 껑충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기둥이 유난히 높은가 하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가만히 보면 공포가 겹겹이 올라간 위에 팔작지붕이 아닌 맞배지붕이 얹히다보니 그런 느낌을 준 것인데 특이하게도 박공널과 풍판이 붙은 지붕 측면 쪽에도 공포가 돌려져 있다.

건물을 한 바퀴 돌면서 보면 뒷면 벽은 더욱 색다르다.세 칸 중 가운데 칸은 두 개의 고주 사이가 바닥부터 지붕 밑까지 모두 굵은 각재로 막혀 있고 위쪽에는 공포가 없다.양쪽 두 칸은 보통 건물들처럼 위쪽에 공포짜임이,아래쪽에는 널판문이 달려 있다.가운데 칸이 고주 두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둥머리와 기둥머리 사이를 가로로 잇는 창방과 ㅍ여방이 양쪽 두 칸에만 있고 가운데 칸에서는 끊어져 있는 유례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이처럼 독특한 구조를 지닌 안심사 대웅전의 비밀은 1979년 해체 수리를 하면서 밝혀 졌다.즉 이 건물은 처음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었고 보통 법당처럼 안쪽의 불단 좌우에 고주를 세운 형식이었다.그러나 어느 때인가 뒤쪽 한 칸이 손상되자 원래 모습을 되살리지 않은 채 고주를 드러내어 바깥기둥으로 삼고 후불벽을 그대로 바깥벽으로 만들면서 지붕도 맞배지붕으로 바꾼 것이다.기단부 발굴조사에서 뒤쪽 기단이 측소되어 옮겨졌음이 밝혀진 것,뒤쪽 긴 서까래와 짧은 서까래가 너무 길게 겹쳐 걸쳐져 있다는 것 등이 그 근거이다.지금 뒷벽을 살펴보면 목재 곳곳에 뚫린 네모난 구멍을 다른 나무로 메우고 기워서 쓴 것을 볼 수 있다.이는 원래의 건물을 헐어 중수하면서 남은 목재를 재활용해 뒷벽을 만든 것으로 해석된다.맞배지붕집이면서 공포가 사방에 돌려진 것은 팔작지붕일 때의 흔적인 것이다.

대웅전은 안심사가 세번째로 중창된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처마 끝에 장식된 암막새기와에 강희 11년 임자라는 명문이 있어 현종 13년(1672)에 기와를 갈았음을 알 수 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위에 든 특징들 외에 앞쪽의 처마는 부연이 달린 겹처마인데 뒤쪽은 홑처마인 점,대웅전 지붕 용마루 한가운데에 청기와 한 매가 얹혀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정면 3칸의 한 가운데 4짝,양쪽 두 칸에는 3짝짜리 빗살문이 달렸고 측면에는 앞쪽 칸에 출입문을 한짝씩 달고 나머지는 토벽으로 막았다.

법당 안에는 얼굴이 순한 삼존불과 고종 22년(1885)에 그려진 칠성탱,1891년에 그려진 후불탱화가 있다.불단 위의 닫집은 퇴락했지만 매우 섬세하다.안심사 대웅전은 보물 제66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 중에서*


  
청주 안심사 대웅전( 安心寺 大雄殿) 

보물 제664호 
충북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사동리 271  

안심사는 법주사에 딸린 작은 절이다. 통일신라 혜공왕 11년(775)에 진표율사가 지었다고 하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제자를 길렀다 해서 안심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원명국사가 다시 짓고 인조 4년(1626)에 송암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하며 한말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확실하게 지은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79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와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인조 때의 건물로 보인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이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원래는 맞배지붕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통해 건물이 축소·변형되면서 지붕 형식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아 만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에는 삼존불을 모시고 조선 효종 3년(1652)에 만든 영산회괘불탱이 걸려 있다. 이 영산회괘불탱은 폭 4.72m, 길이 7.26m의 모시에 헝겊을 덧붙여 그 위에 그린 불화로 국보 제2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