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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선생묘.생가(丁若鏞先生墓.生家).경기 남양주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정약용선생묘.생가(丁若鏞先生墓.生家).경기 남양주

푸른새벽* 2006. 10. 13. 00:39

 

 

 

 

 

 

 

 

 

 

 

 

 

 

 

 

 

 

 

 

 

 

 

정약용선생묘(丁若鏞先生墓)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학자인 다산 정약용


정약용이 태어나고 죽어 몸을 누인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라 불리던 마현리(馬峴里)
뒤쪽으로는 상서로운 느낌을 듬뿍 안겨주는 운길산이 우뚝 솟아있고 그윽한 정취가 눈맛을 시원히 열어주며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이룬 팔당호가 앞쪽 지척에서 넘실거리는 수려한 고장이다


정약용은 여기서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에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성장기와 수학기(1762~1782)를 보냈다
그 뒤 고향을 떠나 벼슬길에 오르고 관리를 지낸 사환기(仕宦期,1783~1836)를 지나
기나긴 유배(1801~1818)길을 떠돌다가 마침내 귀향(1819~1836)를 맞아 생가에 돌아와 여생을 마친다


정약용의 자는 미용(美鏞),호는 다산(茶山)과 여유당(與愉堂) 이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얻은 호이고,여유당은 여기 마현리에서 만년을 보낼 때 지은 호다


1801년(순조 원년)2월 천주교 대탄압사건(신유교옥)이 발생하면서 정약용은 우여곡절을 겪고 그해 11월 전라도 강진땅으로 유배된다


강진읍 동문 밖의 허름한 주막집에서 주인 노파의 인정으로 4년을 보내고 보은산 고성암과 제자의 집에서 4년을 보낸 다음

만덕산 남쪽 자락의 귤동마을 다산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외가 윤씨들의 배려였다


귤동마을은 그의 외가 해남 윤씨 집안의 터잡이 땅이었고
오래전에 고인이 되었으나 정약용의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집이 있었으며
다산초당은 이 마을 윤단의 산정이었다
초당 부근에 차나무가 많아 다산초당.이곳에 10년간이나 머물렀던 정약용의 호도 다산(茶山)이 된다


1619년 10월.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이곳 마현의 생가에 돌아온다
백형 약현(若鉉)이 남아 있을 뿐 부모도 형제들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집은 쇠락해 있었다
다산은 갈건야복(葛巾野服)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위안하며 이 평화로운 고향마을을 소요하기 17년


1836년 2월 22일 오전 8시경 정약용과 부인 풍산 홍씨의 회혼을 맞아 자손과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자신을 뛰어넘는 인물로 키워준 모진 세월을 뒤로 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한국문화유산 답사회 엮음 '답사 여행의 길잡이-경기북부와 북한강 '편에서*

 

정약용선생묘(丁若鏞先生墓)


시도기념물 제7호(남양주시)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1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의 묘소이다.


16세에 이익(李瀷)의 학문을 접하면서 민생을 위한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이후 새로운 학문인 서학에 흥미를 가졌다. 정조 13년(1789)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형조참의를 지내면서 규장각의 편찬 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정조 16년(1792)에 거중기를 제작하여 수원성을 축조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된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으로 옮겨진 후 순조 18년(1818)까지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선생은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고, 고향인 양주에 돌아와서도 여생을 오직 저술에 몰두하여『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현재 묘역에는 선생과 부인 풍산 홍씨가 합장되어 있는데, 표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마련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 1쌍이 있다. 후에 묘 뒤로 담을 둘렀으며, 묘비도 1기 추가하였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