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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선림원지승탑(襄陽 禪林院址僧塔홍각선사 부도).양양 선림원터 본문

☆~ 풍경소리/강 원

양양 선림원지승탑(襄陽 禪林院址僧塔홍각선사 부도).양양 선림원터

푸른새벽* 2006. 11. 11. 00:11

 

 

 

 

 

 

 

*홍각선사 부도(弘覺禪師浮屠)


홍각의 것이라고 짐작되는 부도탑의 운룡문은 빼어나다
비록 몸돌과 상륜부는 잃어버렸지만 나라 안에서 드물게 보는 것이다
이 부도탑과 여주의 고달사 터에 있는 '원종대사 혜진탑'을 포함한 부도탑 두 기는
중대석을 운룡문으로 장엄한 것이 서로 닮아 있다
그로 미루어 보면 홍각은 혜목산문(惠目山門),곧 봉림산문(鳳林山門)에 속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또한 여주의 고달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조 선사 체징과의 관계를 보면 그는 가지산문(迦智山門)에 속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체징은 도의 선사를 잇는 염거 화상이 세운 억성사인 이 곳 선림원에서 선정에 들었으며
신라 47대 헌안왕 4년인 860년에 장흥에 보림사를 세우고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을 열었던 인물이다

 

홍각은 이미 체징이 가지산문을 세운 지 십여 년 뒤에 선림원으로 들어
금당과 더불어 불전을 일구며 중창했으니 그들이 직접 만난 적은 없을테지만
이어지는 선법을 끊지는 못했으리라 짐작한다


홍각선사는
1300여 년 전쯤 경주에서 태어났고 열 일곱 살에 긴 머리카락을 진흙에 던지고 세속의 옷을 벗었다
스님이 된 것이다
그 후, 합천의 해인사에서 공부를 하고 지금은 터만 남은 합천의 영암사(靈巖寺),
그리고 여주의 고달사(高達寺)와 설악산의 억성사(億聲寺)에서 선정에 들었다가
홀연히 험한 산 깊은 골짜기를 찾아서 절을 되살렸으니 그 곳이 지금 선림원 터라 부르는 이 곳이다


홍각선사부도 비의 글은 김원이 짓고,글씨는 운철이라는 스님이 왕희지의 글씨를 한자 두자 모았으며
보덕사의 스님이었던 혜강이 돌에 새겼는데
김원은 장흥의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의 글씨를 쓴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용이 새겨진 그의 탑비 중 몸돌은 이 곳에 없고 받침돌과 머릿돌만 덩글마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몸돌은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는 까닭으로 무수히 많은 탁본을 당해야 했고
선비들이 탁본을 하러 올 때마다 인근 주민들은 까닭모를 노역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를 견디다 못한 주민들은 그것이 없어지면 노역을 면할까 싶어 탑비에 불을 지르곤 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1700년대 중반에 깨지고 말았다


부도를 살펴보면
사각의 지대석 위에 팔각의 하대받침이 놓였다
지대석과 한놈인 하대받침의 각면에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안상 안에는 한 칸씩 건너가면서 사자 한 쌍씩을 조각하였고 네 면의 안상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팔각의 하대받침 위에 놓인 것이 복련의 조각한 하대석,곧 연화대좌 인데
복련의 각 모서리 반전이 경쾌하고 긴장미가 넘친다
복련 위에는 중대석을 받치는 팔각의 굄대가 놓여 있다


그 위에 한몸인 중대석과 상대석을 올려 놓았다
중대석은 높직한 원주형의 기둥인데,위쪽이 아래쪽보다 조금 좁고 용과 구름 조각이 살아 꿈틀대듯
조각돼 있어 상승감이 돋보인다
특히 중대석의 용 조각은 환조에 가깝게 조각이 깊다


홍각선사의 사리를 모신 이 부도는
대략 886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도 중대석에 운룡문이 나타나는 최초의 양식으로 여겨진다
중대석에서 한몸으로 이어지는 상대석에는 원형 앙련이 장식되어 있고
상대석 윗면에는 탑신부를 받치기 위한 높직한 굄대가 마련돼 있다
높이 1.2m, 보물 제 447호
*이지누 지음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중에서*

 

선림원터부도(禪林園址浮屠)


보물 제447호
강원 양양군 서면 황이리 424 


일제 때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1965년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원래의 위치는 지금보다 산기슭으로 약 50m 위에 있었다고 한다.
지대석 위에 상.중.하대로 형성된 기단부만 온전히 남아 있고,그 위에 있던 탑신부와 상륜부는 없어졌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팔각의 하대받침이 놓였다.지대석과 한몸인 하대받침의 각면에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안상 안에는 한 칸씩 건너가

면서 사자 한 쌍씩을 조각하였는데,암수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상대방을 돌아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네 면의 안상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팔각의 하대받침 위에 놓인 것이 복련을 조각한 하대석,곧 연화대좌인데 복련의 각 모서리 반전이 경쾌하고 긴장미가 넘친다.
복련 위에는 중대석을 받치는 팔각의 굄대가 놓여 있다.


그 위에 한몸인 중대석과 상대석을 올려놓았다.중대석은 높직한 원주형의 기둥인데,위쪽이 아래쪽보다 조금 좁고 용과 구름 조각이 살

아 꿈틀대듯 조각돼 있어 상승감이 돋보인다.특히 중대석의 용 조각은 환조에 가깝게 조각이 깊으며 부리부리한 눈,큼직한 코와 입,유

려하게 조각된 가느다란 털,윗입술에 붙여 길게 올려 내민 혓바닥 등은 상상의 동물인 용을 표현한 것이지만 사실감이 느껴질 정도이

다.


홍각선사의 사리를 모신 이 부도는 대략 886년에 건립된 것을 추정되는데 부도 중대석에 운룡문이 나타나는 최초의 양식으로 여겨진다

.중대석에서 한몸으로 이어지는 상대석에는 원형 앙련이 장시되어 있고 상대석 윗면에는 탑신부를 받치기 위한 높직한 굄대가 마련돼

있다.


남아 있는 상태의 현재 높이 1,2m이며,보물 제447호로 지정돼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이 길잡이'중에서*


 
양양 선림원지승탑(襄陽 禪林院址僧塔)


보물 제447호 
강원 양양군  서면 황이리 산89 

선림원은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가 연 절로, 1948년 절터에서 연대가 804년으로 적힌 신라시대 범종이 나오면서 창건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승탑은 일제시대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부(基壇部)만이

남아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승탑임을 알 수 있는데, 신라 때에 돌로 만든 승탑은 대부분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기단의 아래받침돌·중간받침돌·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

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

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수법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기단의 위아래를 마무리하는 수법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승탑으로, 기단 아래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각형의 일반

적인 승탑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승탑의 건립시기는 절터에 남아있는 홍각선사

비와 이 승탑이 홍각선사의 승탑인 점으로 미루어 신라 정강왕 1년(886)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