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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진전사터부도(陳田寺址浮屠).강원 양양 본문

☆~ 풍경소리/강 원

양양 진전사터부도(陳田寺址浮屠).강원 양양

푸른새벽* 2006. 11. 16. 00:28

 

 

 

 

 

 

 

 

 

진전사터 부도는

우리나라 부도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아주 오래된 부도이다

 

석탑의 2층 기단부 같은 양식의 받침대에 팔각형의 탑신부를 얹은 모습이다

상하 기단의 면석에는 좌우에 우주가 있고 가운데 탱주를 모각해놓았다

 

상층 기단에 팔각의 몸돌을 얹기 전에 연꽃을 조각한 괴임석을 받쳐 놓았다

연화대에는 꽃잎 16장이 장식되어 있다

1968년 복원 공사 때

이 연화대 위쪽 중앙에서 크기가 26.5cmx 29cm,깊이가 9.5cm인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연화대 자체가 높지 못하니 사리공도 깊지는 못하나

너비는 넓은 편이다

연화대를 별개의 돌로 조성한 것은 사리공을 안치하기 위한 것으로

석조 부도에서 이러한 장치를 한 유례는 아직까지 조사된 바가 없다

 

팔각의 몸돌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다만 정면에 액자틀 같은 모양으로 문을 조각하였으나 자물쇠나 문고리 같은 장식은 없다

 

역시 팔각인 지붕돌 추녀에는 깊고 널찍한 낙수홈이 파여 있고

그 안쪽을 보면 탑신석과 맞닿는 부분에 1단의 괴임이 돌출돼 있다

지붕돌 윗면에는 상륜부를 받치기 위한 팔각의 단이 있고

그 위에 복엽 복련이 장식돼 있다

 

그 중앙에 찰주가 있어 보주석을 고정시키고 있다

보주는 봉오리 모양으로 된 원형인데

아랫부분에 단엽 복련이 장식돼 있어 지붕돌 윗면의 복련과 잘 어울린다

 

진전사터 부도는

우리나라에 부도의 모습이 아직 구체화 되기 이전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곧 부도의 초기 모습으로 파악된다

 

선종이 등장하기 이전

신라의 큰스님들,곧 의상,원효,자장 등 어느 스님도 부도를 남기지 않았다

 

화엄의 세계에서 고승의 죽음은 그저 죽음일 따름이며 깊은 의미를 갖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인 선종에서 고승의 죽음은 곧 석가모니의 죽음과 다르지 않았다

다비한 사리를 모시는 것이 당연한 예우가 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부도의 탄생은 선종의 유포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이처럼 진전사터의 부도는 큰 의미를 갖는다

처음 시도되는 부도였기에 양식으로는 석탑의 기단부를 받침대로 사용하고

당나라에 있는 초당사(草堂寺)의 사리탑에서 탑신부의 팔각당 양식을 빌어왔다

 

도의선사 이후 그의 제자인 염거화상에 이르면

부도는 장구의 몸체를 연상케 하는 연꽃 받침대에 팔각당을 얹은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신라 하대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부도의 모범이 된다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의 부도에 이르면

석탑보다도 부도에 더 정성을 다했던 당시의 현상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진보와 보수가 어색한 합의를 한 것처럼 여겨진다

왜냐면 기단부는 당시의 전통적인 탑 형식을 취했지만

탑신부는 당시로서는 아직 보지 못하던 양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새로운 표현 양식을 한 조형물이 생겨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전사터 부도를 우리나라 부도탑의 처음이라고들 이야기하며

그것을 시작으로 선종 사찰에는 부도탑과 탑비가 함께 세워지게 되었다

 

높이 3.7m이며,보물 제 439호로 지정돼 있다

*한국문화유산의 길잡이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와 *이지누 지음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에서 발췌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襄陽 陳田寺址 道義禪師塔)


보물 제439호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1 


멀리 동해바다가 내다보이는 진전사터 안의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탑으로, 진전사를 창건한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추정된다. 도의는 선덕왕 5년(784)에 당에서 선종을 이어받고 821년에 귀국하여 설법을 시작하였으나, 당시는 교종만을 중요시하던 때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 절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이 탑은 일반적인 다른 탑과는 달리 8각형의 탑신(塔身)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래부분이 석탑에서와 같은 2단의 4각 기단(基壇)을 하고 있어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위로 탑신을 괴기 위한 8각의 돌을 두었는데, 옆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다. 8각의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는 탑신은 몸돌의 한쪽 면에만 문짝 모양의 조각을 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은 서서히 내려오다 끝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살짝 들려 있다.


석탑을 보고 있는 듯한 기단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볼 때 우리나라 석조탑의 첫 출발점이 되며, 세워진 시기는 9세기 중반쯤이 아닐까 한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치밀하게 돌을 다듬은 데서 오는 단정함이 느껴지며, 장식을 자제하면서 간결하게 새긴 조각들은 명쾌하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