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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터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국립중앙박물관 본문

☆~ 바람소리/박물관

경천사터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국립중앙박물관

푸른새벽* 2006. 11. 19. 23:30

 

 

 

 

 

 

 

 

 

 

 

 

 

 

 

 

 

 

 

 

 

 

 

 

 

 

 

 

 

 

 

 

 

 

 

 

 

 

 

 

경천사지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

 

경천사(敬天寺)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사』에 나오는 것으로 예종(睿宗)이 이곳에서 숙종(肅宗)의 추모제를 열었다는 기록이다.그 후 계속해서 고려 왕실의 추모제가 열렸으며 조선 태조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아 왕실의 원찰(願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천사지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대리석은 이전에 탑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았다.평면 구조는 亞자형 형태와 4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탑신에 비해 낮고 3중으로 된 기단은 정사각형 한 변에 직사각형이 돌출되어 亞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 기단과 동일한 형태의 탑신이 3중으로 올려져 있다.둘째,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탑신과 지붕이 10층까지 이어져 있으며 그 위로 상륜부가 설치되어 있다.이러첨 경천사지석탑은 우리나라 탑 가운데 매우 이례적인 구조적 형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층 탑신 이맛돌에는 원(元)지정(至正) 8년(1348) 3월에 진령부원군(晋寧府院君) 강융(姜融)과 원사(院使)고룡봉(高龍鳳)이 시주하여 탑을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경천사지석탑은 각 층이 분리되는 탑이다.기단과 1층부터 3층까지는 각 부분이 다시 또 나뉘어 분리된다.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부재를 분리해보면 각 부분마다 "二層東南" 등의 글씨가 씌어져 있는데 이는 탑을 만들 때 각 부분이 어느 위치에 놓일 것인지를 미리 써 넣어두었던 것이다.이로 미루어 제작 당시부터 매우 정교한 설계도에 의하여 치밀하게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천사지석탑은 전체적인 형태로도 아름답지만 더욱 아름다운 것은 빈 공간을 거의 남기지 않고 탑 전체에 새겨놓은 조각상이다.이 탑의 재질은 오늘날의 학습용 조각도로도 조각할 수 있을 정도의 무른 대리석이기 때문에 화강암 탑에서 할 수 없었던 고도의 정교한 조각술을 이 탑에 모두 쏟아부었던 것 같다


일반적인 탑의 경우 기단과 탑신,상륜의 새 부분으로 나눌 수 있지만 이 탑은 형태적으로 네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그 네 부분은 높이가 낮은 3중의 기단,기단과 평면 형태를 같이 하는 3층의 탑신, 사각의 7층 탑신과 상륜이다.특히 평면의 구조가 급격히 작아지는 3층과 4층 사이의 지붕은 다른 지붕과는 달리 2중의 지붕 구조를 가진 중층 지붕으로 되어 있어 매우 특이하다.실제로 이 부분을 정점으로 탑을 나누었을 때 탑의 높이는 거의 절반 지점에 해당된다


따라서 탑에 새겨진 조각상은 크게 亞자형을 이루는 1층 부터 3층까지와 정사각형으로 된 4층 부터 10층까지의 2중 구조로 나누어 볼 수 있다.먼저 1층 부터 3층까지는 총 평면이 20각을 이루며 한 면 당 다섯 정면이 조각의 기본 단위가 된다.중앙의 정면이 상단,안으로 꺾여지는 부분이 중단,다시 정면을 바라보는 안쪽이 하단이 되는 3단의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3층까지의 공간에 불교의 신앙을 담고 있는 법회(法會)의 내용이 모두 열두 정면으로 조각되어 있다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4층은 네 면에 또 다른 법회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5층에는 각 면에 다섯구씩 총 20구의 여래좌상을 조각하였고 6층 부터는 각 면 3구씩 총 12구의 여래좌상을 표현하여 총 80구의 여래상이 조각되어 있다.또한 탑에 나타나는 모든 기둥에는 용이 양각되어 꿈틀거린다


이 탑을 세운 목적은 무엇이었을까.1층 탑신의 이맛돌에 새겨진 명문에는 이 탑을 세우는 목적에 대하여 "원나라 황실과 고려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불법(佛法)이 널리 퍼져나아가 모든 중생들이 불도(佛道)를 이루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을 싣고 있다.즉,경천사탑을 통하여 일체의 여래와 일체의 불교 법회를 고려 땅에 재현함으로써 나라와 모든 중생들이 불국토(佛國土)에 살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이 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라의 안녕이 깨지기 시작하던 구한말에 이르러 이 탑의 비극은 시작되었다.1906년 12월 황태자(순종 황제)의 혼례식에 경축대사로 파견되었던 일본 궁정대신 다나카 미쓰아키는 1907년 3월 초 수십 명의 일본인을 동원하여 현지에 서 있던 경천사지석탑을 제멋대로 분해하여 일본으로 불법 반출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다나카는이 탑을 고종 황제가 하사한 기념품이라고 꾸며 주민과 당시 관할 군수의 저항을 무마시키려 하였다.그러나 그의 불법 행위는 곧 신문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해체된 경천사지석탑은 인천항까지 기차로 운반된 후 배편으로 도쿄 다나카의 집으로 옮겨졌다.그러나 연일 보도되는 언론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다나카의 행위를 비판하는 항의가 거세게 일자 결국 굴복하여 1919년경 다시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오랫동안 포장된 채 일본에 방치되어 있었던 탑은 훼손이 심하여 복원되지 못하고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 경복궁에 복원되어 최근까지 공개되었다.그러나 오랜 기간 서울의 산성비에 노출되어 재질상 약한 대리석에 치명적인 결함이 확인되어 1995년 또 다시 해체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철저한 고증과 보존을 거쳐 현재는 용산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전시되어 있다

*강우방.신용철 지음 '탑'중에서*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


국보 제86호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경천사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던 절로, 고려시대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 세워져 있었던 이 탑은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무단으로 반출되었던 것을 되돌려 받아 1960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3단으로 된 기단(基壇)은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고, 그 위로 올려진 10층의 높은 탑신(基壇)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이었다가, 4층에 이르러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단과 탑신에는 화려한 조각이 가득 차 있는데, 부처, 보살, 풀꽃무늬 등이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4층부터는 각 몸돌마다 난간을 돌리고, 지붕돌은 옆에서 보아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골을 표현해 놓는 등 목조건축을 연상케 하는 풍부한 조각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탑의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 많이 출현했던 고려시대에서도 특수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특이하다.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끌며,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건축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훼손되었던 원래의 탑 형태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 새로 개관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