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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묘길상탑(海印寺妙吉祥塔).경남 합천 본문

☆~ 풍경소리/경 남

합천 해인사 묘길상탑(海印寺妙吉祥塔).경남 합천

푸른새벽* 2006. 12. 6. 23:58

 

 

 

 

 

 

해인사 묘길상탑(妙吉祥塔)


해인사 일주문 못미처 이런저런 스님들이 부도비가 들어선 해인사 비석거리 한 옆에 푸른 이끼 곱게 앉은 자그마한 삼층석탑 하나가 있다.묘길상탑(妙吉祥塔)이다.그냥 길상탑이라 부르기도 한다.전체 높이 3m쯤으로 크기만 작을 뿐 이중기단에 3층 탑신,5단의 처마받침을 가진 전형적인 신라탑이다


보통 탑이라면 층수에 따라 구별하여 보통명사로 부를 뿐,이 탑처럼 고유명사로 지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그러면 어찌하여 이 작은 탑은 저만의 이름을 달게 되었을까? 또 탑이라면 으례 법당 앞마당에 자리하게 마련이다.그런데 왜 이탑은 많은 사람 오르내리는 길가에 서 있는 걸까?


1966년 여름 일단의 도굴꾼들이 검찰에 검거되고 아울러 탑 안에 안치했던 지석(誌石) 4매와 157개의 흙으로 빚어 구운 작은 탑 따위가 압수되었다.그들은 이것들을 해인사 입구의 작은 삼층석탑에서 꺼냈다고 자백했다.4매의 탑지에 적힌 내용도 그들의 말과 부합하는 것이었다.탑지 4매는 모두 규격과 재질이 같다.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23cm에 두께가 2.5cm쯤 되고 벽둘처럼 흙으로 구워 만들었다.두 장은 앞뒤 양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두 장은 한 면에만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첫번째 지석에는 앞면에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 뒷면에 「운양대길상탑기」(雲陽大吉祥塔記)가 새겨져 있다.

「해인사묘길상탑기」는최치원이 지었으며 진성여왕 9년(895)7월에 전란에서 사망한 원혼들의 명복을 빌기위해 삼층석탑을 세운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이다 .「운양대길상탑기」에는 탑의 높이,소요자재와 경비,그리고 공사관련 인물들의 성명등이 밝혀져 있다.두번째 지석에는 백성사(百城寺)길상탑 안에 공양물로 봉안하려던 불경 목록이 적혀 있다.세번째 지석에는 앞면에 「해인사묘길상탑기」와 같은 취지로 오대산사(五臺山寺)에 길상탑을 세우게 된 내력을 4자씩 떨어지는 운문으로 기록하였고 뒷면에는 전몰한 치군(緇軍), 곧 승병들에게 바치는 조사(弔詞)가 「승병을 애도함」(哭緇軍)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마지막 네 번째 지석에는 전란중 해인사에서 사망한 승려들과 일반인 56명의 명단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다


이상 지석에 새겨진 글의 제목만을 보더라도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우선 이 탑의 정식 명칭이 '해인사 묘길상 탑'이라는 것. 묘길상탑은 불사리를 안치한 예사 탑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일종의 기념탑으로 말하자면 전몰 장병 위령탑이라 할 수 있다는 것.또 하나 승병 혹은 승군이 적어도 통일신라 말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끝으로 동일한 취지의 탑을 해인사를 비롯한 몇 군데 세우려다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해인사에만 건립하게 되어 나머지 탑지들을 여기에 함께 넣었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오래된 탑 하면 으례 불탑,사리탑이라고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 그와는 전혀 건립 배경을 달리 하는 탑이 있을 수 있다는 뜻밖의 사실이다


최치원과 해인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앞에서 살펴 본 대로 묘길상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사회 상황을 추적할 수 있는 소중한 정보원의 하나이다.크기는 작지만 의미는 큰 탑이다.보물 제 1242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해인사길상탑(海印寺吉祥塔)


보물 제1242호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받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었다. 위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짜여져 다른 탑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탑신은 1층의 몸돌이 2·3층의 몸돌보다 크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각 층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네모난 받침돌만 남고 모두 없어진 상태이며, 받침돌 윗면에 쇠꼬챙이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중 조그만 탑이 157개가 있으나, 소탑은 원래 99개, 77개를 두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없어진 듯 하다.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는 4장인데,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小塔)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