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충주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충북 충주 본문

☆~ 풍경소리/충 북

충주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충북 충주

푸른새벽* 2006. 12. 13. 23:47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비는
높이 2.03m 너비 0.55m 가량 되는 두툼한 돌기둥 모양으로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만주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매우 닮았다
네 면에 모두 예서풍의 글씨가 새겨졌는데 앞쪽에 23자씩 10행, 왼쪽면에는 23자씩 7행,오른쪽에는 6행,
뒷면은 몹시 마멸되었으나 너비로 보아 9행 정도의 흔적이 있어 모두 400자 가량 된다


마멸된 부분이 많아서 비문 전체의 매용을 완벽하게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첫머리의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구절에서 바로 고구려의 비임을 알 수 있다
또 뒤이은 명문에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하부(下部).사자(使者)와 같은 고구려의 관등명만 나온점과
광개토대왕비에 적힌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등장하는 점도 이 비가 고구려의 비임을 말해준다
또한
'신라토내'(新羅土內)라는 명문이 두 군데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신라이외의 나라가 신라를 일컬었던 것으로 고구려에서 신라땅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비문의 내용은
앞부분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사이좋게 지내던 때의 일이 적혀 있고
뒷부분은

두 나라의 사이가 나빠져서 백제 개로왕(455~475)과 신라가 힘을 합해 고구려에 대항한 내용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고구려가 한강 상류인 이 지역까지 세력을 넓힌 것은 장수왕(413~491)때의 일이다
고구려는 광개토왕(391~413)때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뒤이어 장수왕 때 남하정책을 단행함으로써
평양성을 비롯하여 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미치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므로 이 비는 고구려가 장수왕 때 한강 상류의 여러 성을 공략한 후 나라의 남방 경계이자
앞으로 남방 진출의 거점이 될 이 곳에 기념비로 세운 것이라 추정된다
따라서 이 비의 건립연대는 5세기 후반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의 금석은 손꼽을 정도로 적다
그 가운데 중원 고구려비는 그 존재만으로도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며
우리나라 안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서 국보 제 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국보 제205호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280-11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경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