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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충북 충주 본문

☆~ 풍경소리/충 북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충북 충주

푸른새벽* 2006. 10. 28. 00:0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보물 제658호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청룡사 옛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인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보각국사 혼수(1320∼1392)는 도를 지킴에 조심하고, 특히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2세에 출가하

여 22세 때에는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청룡사로 옮겨가 머물렀다.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

니며 수도하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청룡사로 돌아와 73세에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내려 ‘보각국사’라 하고, 탑이름을 ‘정혜

원융’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

는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자료*


*보각국사혼수(普覺國師 混修)

1320(충숙왕 7)~1392(태조 1).
고려 말기의 승려.

속성은 조씨(趙氏).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庵). 아버지는 숙령(叔岺)이다.

12세에 대선사 계송(繼松)에게 출가했으며,
내외의 전적을 널리 익혀 이름을 떨쳤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선시(禪試)에서 상상과(上上科)에 올랐다.
금강산에서 2년 동안 마음 밝히는 공부를 하다가

노모를 위해 돌아와 경산(京山)에서 5~6년간 우거했으며,
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대자법화경 大字法華經〉을 써서 명복을 빌었다.


그뒤 선원사(禪源寺)의 식영암(息影庵)에게 〈능엄경 楞嚴經〉을 배우고,
충주 청룡사(靑龍寺) 서북쪽의 연회암(宴晦庵)에서 지냈다.

공민왕이 회암사(檜巖寺)에 있게 했으나 가지 않고,
오대산 신성암(神聖庵)에 머물렀다.
그때 나옹(懶翁)이 고운암(孤雲庵)에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찾아가 공부하고
뒤에 가사(袈裟)·불자(拂子)를 받았다.


1369년(공민왕 18)

백성군(白城郡)의 김황(金璜)이 원찰(願刹)로 세운 서운사(瑞雲寺)에서 참선 법회를 열었다.

 

1370년 공부선장(功夫選場)을 열어 나옹으로 하여금 시취하게 할 때 홀로 대답해 합격했으나,
공민왕이 요직에 두려 하자 도피해 위봉산(圍鳳山)에 숨었다.


1374년 다시 소명을 받고 내불당(內佛堂)에서 왕에게 법요(法要)를 가르쳤다.

우왕 즉위 후에는 송광사(松廣寺)·광암사(光巖寺) 등에 머물렀다.

 

1383년(우왕 9) 국사에 책봉되었으며 정편지웅존자(正遍智雄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1389년(공양왕 1) 치악산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국사로 봉해져 개천사(開天寺)로 옮겼다.


1392년(태조 1) 청룡사로 옮겨 그곳에서 입적했다.

 

저술로는 〈환암어록 幻庵語錄〉이 있다.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호는 정혜원융(定慧圓融)이다.
비와 탑이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에 있다.

 *김남용 지음 '국보와 보물이 있는 옛절터이야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