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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은사터 동서 삼층석탑(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경북 경주 본문

☆~ 풍경소리/경 북

경주 감은사터 동서 삼층석탑(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경북 경주

푸른새벽* 2006. 12. 16. 23:44

 

 

 

 

 

 

 

 

 

 

 

 

 

 

 

 

 

 

 

 

 

 

 

 

 

 

 

 

 

 

 

 

 

 

 

 

 

 

 

 

 

 

 

 

 

 

 

 

감은사터 동서 삼층석탑(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


감은사터석탑은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세워진 모든 삼층석탑의 시원(始原)이 되는 석탑이다.석탑은 미륵사터석탑으로 백제에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재료가 석재일 뿐 전체적으로 목탑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목조 구조를 단순화시킨 석탑 양식은 감은사터석탑에서 시작되었다.그것이 성립된 시기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점이라는 점은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지대석과 기단부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동탑의 경우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서탑의 경우 탑 주변으로 인도 스투파의 베티카에 해당하는 일정한 너비의 탑구(塔區)가 마련되어 있다.이를 따라 자연스럽게 탑을 돌 수 있으며 그 자체가 탑을 예배하는 탑돌이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구조는 목탑의 경우 기단 상부에 일정한 공간이 있어 그 곳을 통하여 탑돌이가 가능하나 석탑의 경우에는 기단 위로 올라갈 수 없으므로 이러한 구조가 탄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감은사터석탑의 양식과 기존 석탑 양식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은사터석탑의 기단이 이중기단이라는 점이다.기단이 2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목탑의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이중기단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탑신이 지상에서 높아져 전체 구성에 있어 매우 높은 안정감을 준다


감은사터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화강암보다 입자가 약한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주변에서 생산되는 석재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전체적으로 사리장엄구를 안치한 3층탑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돌을 짜맞추는 방식으로 조립되었는데 돌과 돌 사이를 연결하기 위하여 쇠로 만든 나비장이 사용되었다.기단과 1층탑신 그리고 2층탑신 내부에는 잡석과 흙으로 단단히 채워져 있다


대부분의 탑들이 상륜부는 물론 그것을 꿰뚫는 찰주도 남아 있지 않은데 비해 감은사터석탑은 동서탑 모두 찰주가 남아 있다.현재 노출되어 있는 찰주의 높이는 3.9m이나 해채.수리시 찰주를 들어낸 결과 제작 당시 전체 높이가 5.0m에 이르는 주조(鑄造)된 철주(鐵主)로 사리장엄구가 봉안된 3층 탑신까지 연장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 기의 탑은 전체적인 결구 방식과 쓰여진 석재의 수가 동일하지만 크기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즉 서탑에 비해 동탑의 각 부재가 조금씩 크다.그 결과 양 탑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동탑이 더욱 괴체적(塊體的)이고 장중한 느낌이 든다.1959년과 1996년 서탑과 동탑이 각각 해체.복원되는 과정에서 신라 금속공예의 정수인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이 다량의 공예품을 통하여 감은사터석탑이 당시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인정받는 뛰어난 예술품이라는 점과 함께 국제적 우수성과 독창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이는 감은사터삼층석탑이 위대한 시대 정신을 바탕으로 탄생된 명작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강우방.신용철 지음 '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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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은사 탑은 우리나라 삼층석탑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총높이 13 m 몸체 위에 꽂혀있는 상륜부 고리인 쇠꼬챙이(擦住) 의 높이 인 3.9 m 를 제외해도  9.1 m 가 되는 장중한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 기세는 결코 허세를 부리는 가장된 상승이 아니다.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린 팽창된 힘에 유지되어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엄정한 기품이 서려있다.어떠한 문화유산을 이야기 할 때 단지 그 대상물 자체만 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그것을 낳은 시대도 위대한 것이다.감은사지 석탑을 위대하다고 하는것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정신이 이 탑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감은사지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세워지는 모든 삼층석탑의 始原 이 되는 석탑이다

 

석탑은 미륵사지석탑과 같이 백제에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재료가 석재일 뿐 전체적으로 목탑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목조 구조를 단순화시킨 석탑 양식은 감은사지석탑에서 시작되었다.그것이 성립된 시기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점이라는 점은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감은사지석탑의 양식과 기존 석탑 양식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은사지석탑의 기단이 이중기단이라는 점이다.기단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목탑의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이중기단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탑신이 지상에서 높아져 전체 구도에 있어 매우 높은 안정감을 준다

 

대부분의 탑들이 상륜부는 물론 그것을 꿰뚫는 찰주도 남아 있지 않은데 비해 감은사지탑은 동서탑 모두 찰주가 남아 있다1959 년과 1996 년 서탑과 동탑이 각각 해체.복원되는 과정에서 신라 금속공예의 정수인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이 다량의 공예품을 통하여 감은사지석탑이 당시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인정받는 뛰어난 예술품이라는 점과 함께 국제적 우수성과 독창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이는 감은사지석탑이 위대한 시대 정신을 바탕으로 탄생된 명작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유흥준 지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에서

 

경주 감은사지동ㆍ서삼층석탑(慶州 感恩寺址東ㆍ西三層石塔)

국보 제112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55-9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청동제사리(보물 제366-1호)와 청동제사각감(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문화재청자료*

 

 

(2005년 5월에 다녀 온 바에 의하면 2006년 4월13일자 뉴스에서는감은사탑 2기중 1기를 해체 보수 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감은사동탑 사리장엄구

동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당시 동아시아의 모든 공예품을 통틀어가장 우수한 것으로 통일신라가 갖는 국제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보물 제 1359 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