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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구층목탑터(皇龍寺九層木塔址).경북 경주 본문

☆~ 풍경소리/경 북

경주 황룡사구층목탑터(皇龍寺九層木塔址).경북 경주

푸른새벽* 2006. 12. 24. 00:31

 

 

황룡사구층목탑터(皇龍寺九層木塔址)


황룡사 금당터를 지나면
황룡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구층목탑의 흔적지가 보인다
지금은 초석만 남아 과거의 영광을 쓸쓸히 말해주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각 초석은 지름이 약 1미터 내외로서 사방에 8개씩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으며
그 중앙에 심초석(心초석: 중심 기둥의 받침돌)이 있다
목탑지의 한 변에 8개씩 모두 64개의 주춧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59개의 주춧돌만 남아 있다


황룡사 목탑터는 한변의 길이가 약 22m인 정방형(정방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총면적은 약 490제곱미터(150평)이다


목탑지 가운데 놓여 있은 심초석은 무게가 약 30톤에 달하며
동.서 길이가 약 453센티미터,남.북 폭이 약 300센티미터,두께가 128센티미터 크기에 달한다


심초석은 장타원형의 화강석이며,

윗면 중앙에 사리를 모셨던 구멍이 있고,이 구멍위를 네모난 돌로 덮어놓았다
이 돌은 몽고군의 침략으로 불탄 뒤에 사리장치를 보호하기 위하여 옮겨왔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심초석에서 나온 금동사리함 등의 사리장엄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황룡사 구층목탑의 높이는 약 80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현재 아파트 30층 높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옛날 이런 높이의 목탑을 세웠다는 것은 굉장한 솜씨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목탑을 세우기 위해서는 기초가 튼튼해야 했을 것이다
목탑지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늪을 이루는 바닥에서부터 사람 머리만한 크기의 냇돌을 깔고
진흙을 덮고 다지는 방법을 28회나 반복하여 기초를 다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초라면 약 80미터 높이의 목탑도 충분히 건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조성된지 50년이 지난 효소왕 7년(698)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고려의 고종 25년(1238)에 몽고군의 침입에 따른 화재로 가람 전체와 탑이 불타 버린뒤 복원되지 못했다


자장율사의 건의에 의해 신라 사람들이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운 것은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황룡사의 구층목탑은 각각의 층이

당시 신라를 둘러싸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아홉나라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1층은 왜(倭).2층은 중화(中華).3층은 오월(吳越).4층은 탁라(托羅).5층은 응유(應遊).
6층은 말갈(靺鞨).7층은 단국(丹國).8층은 여적(女狄).9층은 예맥(濊貊) 을 각각 배정했던 것은
이들 이웃 나라의 침략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웃하고 있는 고구려나 백제가 빠져 있는 것은
황룡사 구층목탑의 건립이 삼국통일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남용 지음 '옛 절터 이야기'중에서*

 

 

 *목탑지의 심초석

 

 *황룡사탑을 건립한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기린 기념비

 

 *아비지 기념비 뒷면에 있는 황룡사 구층목탑의 복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