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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터(皇龍寺址).경북 경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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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터(皇龍寺址).경북 경주

푸른새벽* 2006. 12. 24. 00:35

 

 





 









 

 





 





 





 





 





 





 





 









 

 









 

 





 





 









 

 









 

 





 





 





 

황룡사터(皇龍寺址)

 

사적 제6호

경주시 구황동


신라 최대 사찰인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 경주 월성(月城)동쪽에 궁궐을 짓던 중 황룡(黃龍)이 나타나 사찰로 고쳐지어 570년에 완공되었다.574년에는 5m가 넘는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을 봉안하였고 584년에 삼존상을 제대로 모시기 위해 금당을 확장하였다.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에서 돌아온 자장(慈藏.590~658)율사의 주장으로 구층목탑을 짓기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


신라 때 뿐 아니라 고려 시대에도 경주의 중심 사찰 역할을 하다가 1238년 몽고의 침략으로 불에 타 폐사되었지만 황룡사는 신라 왕실 최대의 호국사찰일 뿐 아니라 경주 시가의 중심 사찰로 도시적 랜드마크가 되기도 하였다.경주 왕경(王京)의 4개 방리를 차지한 24500여 평의 넓은 땅은 원래 늪지였던 곳으로 경주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남겨진 유휴지(遊休地)였다.그러나 이 땅은 경주를 둘러싼 동서남북 네 곳의 산 - 명활산.선도산.남산.소금강산 - 을 잇는 교차점으로 확장된 경주의 지리적 중심지였다.이런 점에서 황룡사는 경주의 신도심을 이루는 도시적 거점이기도 하였다.여기에 세워진 80여 미터의 초고층 목탑은 황룡사의 상징이자 경주 전체의 전망탑이 되기에 충분하였다.신라의 세 가지 국가 보물 가운데 두 가지가 황룡사 구층목탑과 장륙존상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황룡사는 국가를 대표하는 가람이었고 금당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전설적인 벽화 「노송도(老松圖)」가 있었으며 강당에서는 자장이 『보살계본(菩薩戒本)』을,원효(元曉.617~686)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황룡사는 처음에는 궁궐로 계획되었다가 사찰이 되고  다시 거대한 초고층 목탑이 들어서서 가람이 완성되기까지 93년이나 걸렸고 이후에도 여러 번의 중창이 있었다.1976년부터 시작된 전면 발굴조사 결과 가람배치는 크게 네 차례에 걸쳐 변화된 것으로 밝혀졌다.


창건 가람은 궁궐에서 사찰로 변형된 사실을 말해주듯 세 개의 긴 직사각형 영역을 일렬로 배치하였다.그 중 중심곽에는 회랑을 둘러 독립시키고 그 안에 탑 - 금당 - 강당을 중심축 선상에 배열하여 1탑 1금당식 가람을 이루었다.이 때의 금당은 후대의 것보다는 규모가 작았으며 창건 탑이 원래 목탑이었는지 전탑(塼塔)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1차 중건 가람은 장륙상을 안치하기 위해 금당을 새로 짓기 시작하여 구층목탑을 건립함으로써 완성되었다.이때 중금당 좌우로 동.서 금당을 나란히 지어 결과적으로 1탑 3금당식 가람이 되었고 좌우 금당을 포함한 넓은 영역을 경계로 회랑을 둘러 경역(境域)을 완성하였다.중금당은 9X4칸,좌우 금당은 각각 7X4칸 규모였다.회랑은 두 칸 폭의 복랑(復廊)이었으며 구층목탑의 1층은 7X7칸 규모였다.


2차 중건 가람은 황룡사 대종(大鐘)이 완성되어 안치된 754년 무렵이라 추정된다.경내의 좌우 앞쪽 모퉁이에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를 건립함으로써 독특한 가람배치를 시도하였다.이 때 경역을 더 확장하기 위하여 중문과 남회랑을 남쪽으로 옮겨 건립한 흔적도 나타났다.중문 바깥에는 다시 담장으로 둘러싸인,옆으로 긴 마당이 있고 앞쪽 담장 중앙에 대문인 남문이 있었다.회랑으로 쌓인 중심곽의 서쪽과 북쪽 바깥에는 숭방터로 추정되는 여러 건물들이 있고 그 외곽은 총 연장 1.2km의 담장을 둘러 도시와 경계를 이루었다.


금당터는 7X2칸의 내진(內陣)을,사방으로 1칸씩 외진(外陣)이 둘러싼 형식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그 중앙에는 삼존불입상을 세웠던 대석(臺石)과 좌우로 5기씩의 다른 대석들이 남아 있다.좌우 대석들은 10대 제자상일 가능성이 높다.내진은 2개 층 높이를 한 층으로 만들어 놓은 실내공간에 거대한 불상과 보살상들이 가득하였고 그 외곽으로는 이중기단 위에 덧지붕을 씌운 1층 공간이 둘러싼 모습이었을 것이다.


역사상 한국 최대의 목탑이었던 구층탑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와 신라 재상 용춘(龍春)이 200여명의 소장(小匠)들을 지휘하여 완공하였다.높이 225척 (동이척.약 80m)으로 내부의 각 층은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던 것으로 추정된다.9개 층은 선덕여왕에게 조공을 바칠 아홉나라  -왜(倭).중화(中華).오월(吳越).탁라(托羅).응유(應遊).말갈(靺鞨).단국(丹國).여적(女狄).예맥(濊貊) -을 뜻한다고 한다.이 목탑을 완공함으로써 신라는 국론을 통일하여 일사불란한 국가 체제를 갖추었고 결국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으니, 애초의 건립목적을 달성한 셈이다.872년 중건할 때 안치한 『찰주본기(刹柱本記)』와 사리,소형 탑 99기를 발굴 조사 중 발견하였는데 이는 황룡사탑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김봉렬 지음 '불교건축'중에서*

 

 



*황룡사터 금동삼존장륙상 대좌

 

정면 9칸 측면 4칸의 금당 안에는 높이가 일장육척이나 되는 걷한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십대 제자상,신장상 2구가 있었다

 

지금 금당 중앙에 남아 있는 3개의 석조대석이 바로 이 금동삼존장륙상을 안치하였던 대좌이다.이 대좌의 크기로 보아 불상의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대좌는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의 윗면을  평평하게 고른 뒤  장륙상의 발이 들어가게 홈을 파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켰다.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인데 ,이러한 모양은 좌우 협시불의 대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황룡사 복원 예상도(국립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