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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부석사(小白山 浮石寺).경북 영주 본문

☆~ 절집.절터/경 북

소백산 부석사(小白山 浮石寺).경북 영주

푸른새벽* 2007. 2. 23. 00:24




 




 




 

 







 

 




 







 




 

 

 



 




 







 

 




 




 




 




 




 

 






 

 







 




 

 

소백산 부석사(小白山 浮石寺)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백두대간 소백산맥의 줄기인 봉황산 중턱 높은 곳에 자리잡은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펼친 최초의 가람이다


신라 통일기의 사상을 주도한 의상은 새롭게 화엄학을 펼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의상과 그 후예들은 신라 각지에 화엄도량을 건립하였는데

후대 역사가들은 그들 가운데 여러 곳을 추려서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불렀다
부석사는 화엄십찰 가운데 제1의 가람이다


의상이 이 곳에 부석사를 창건하려고 하자 터를 잡고 있던 다른 신앙의 무리들이 격렬히 저항했으나
중국에 유학할 때부터 의상을 흠모했던 선묘낭자의 화신이 나타나 절을 세울 수 있게 도왔다는 유명한 '선묘설화'가 전한다
부석사의 이름은 이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화엄종찰답게 경사지에 여러 개의 대석단을 쌓아 계단식으로 터르르 마련하여 폭은 좁으나 깊이감이 느껴지도록 가람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부석사는 입구부터 가장 뒤쪽 무량수전에 이르는 진입축이 구성축이 되고
진입축 선상에 천왕문과 범종각,안양루가 위치하여 가람의 영역을 3단계로 나누고 있다
어려 기록에 따르면,천왕문과 범종각 사이 대석단 위에는 회전문이 있었고
범종각을 지나 안양루 아래에는 또 하나의 법당이 있었다고 한다
대석단들은 천왕문부터 무량수전까지는 10단,회전문부터는 9단이 된다
이렇듯 특이한 석축의 구성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10지도론'을 표상하였다는 주장과
정토신앙에서 말하는 극락의 '3품3생론(三品三生論)'의 상징이라는 교리적 해석이 엇갈린다


더 큰 의문은 '천왕문에서 사라진 법당까지 잇는 축'과 '안양루에서 무량수전을 잇는 축'이 서로 엇갈려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휘어진 축선의 구성 때문에 많은 추론들이 제기되었지만
우선 천왕문을 들어서서 회전문과 범종각을 거쳐 사라진 법당까지 하나의 과정이 일단락되고
다시 그 뒤편 위쪽으로 다른 축을 가진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는 두 개의 가람이 연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가람의 축은 멀리 도솔봉과 가까이 안산에 맞추어져 있다
조선시대까지 부석사는 화엄사찰이나 정토사상을 교리적 바탕에 깔고 자연 지형에 잘 맞추어 건설된 매우 입체적인 가람이었다
현재 많은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남겨진 석단의 구성만으로도 뛰어난 고안감을 느낄 수 있으며
커다란 자연석들을 생김새에 맞추어 가공하여 견고하게 쌓은 대석단의 조형은 그 자체로도 큰 감동을 준다


부석사는 고려시대 건물인 무량수전과 조사당(祖師堂),소조여래상(塑造如來像),조사당벽화,

석등,삼층석탑,당간지주 등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전국에 남겨진 고려시대 목조건물을 열손가락 안에 꼽는데 부석사에만 두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는 점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특히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의 연대가 확인되기 이전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유명하였다
*김봉렬 지음 '불교건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