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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瞻星臺).경북 경주 본문

☆~ 풍경소리/경 북

첨성대(瞻星臺).경북 경주

푸른새벽* 2007. 1. 1. 23:29

 

 

 

 

첨성대(瞻星臺)


첨성대의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2중 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 놓았다
각 석단의 높이는 약 30cm이고 화강암 하나하나가 같은 형태지만
각 석단을 이루는 원형의 지름이 점차 줄어 들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13단과 15단의 중간에 남쪽으로 네모난 창을 내었는데 그 아래로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창구를 통해 출입하면서 관측하였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이 창구 높이까지 내부는 흙으로 메워져 있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 361개 반이며 음력으로 따진 일년의 날수와 같다
원주형으로 쌓은 석단은 27단인데,맨 위의 井자 모양의 돌까지 따지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석단 중간의 네모난 창 아래위 12단의 석단은 12달,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첨성대 꼭대기의 井자 모양의 돌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
석단 중간의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에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을 나누는 분점의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첨성대는 갖가지 상징과 과학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미적(美的)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과 원형을 적절히 배합해

안정감 있고 온순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매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꼭 절반으로 된 것도 안정감을 표현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첨성대는 높이 9.108m,밑지름 4.93m,윗지름이 2.86m이며,제 27대 선덕여왕 재위중(632~647)에 축조되었다
국보 제 3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경주 첨성대(慶州 瞻星臺)


국보 제31호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