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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 (慶州 東宮과 月池).경북 경주 본문

☆~ 풍경소리/경 북

경주 동궁과 월지 (慶州 東宮과 月池).경북 경주

푸른새벽* 2006. 12. 31. 23:45

 

 

 

 

 

 

 

 

 

 

 

 

경주 동궁과 월지 (慶州 東宮과 月池)

 

사적

경북 경주시 인왕동 517 번지 일대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문화재청자료*

 

안압지(雁鴨池)

사적 제18호

경주시 인왕동


안압지는
신라 천년의 궁궐인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다
통일 시기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 많은 부(富)를 축적한 왕권은 극히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누리면서
크고 화려한 궁전을 갖추는데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통일 직후 674년에 안압지를 만들었으며 679년에는 화려한 궁궐을 중수하고
여러개의 대문이 있는 규모가 큰 동궁을 새로 건설하였다


안압지와 주변의 건축지들은 당시 궁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 동궁,곧 임해전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다만 건물터의 초석만 발굴되었다


임해전과 안압지에 대한 기록(삼국사기)을 살펴보면
궁내에 못을 팠다는 기록이 문무왕 14년(674)과 경덕왕 19년(760)에 두 번 나타나며
임해전에서 군신에게 연(宴)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효소왕 6년(697)과 혜공왕 5년(769)에 있다
또 소성왕 2년(800)에는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손되었다고 전한다


이상을 정리해본다면 약 백 년 간격을 두고 궁내에 못을 팠다는 것은
처음 판 못을 보수나 확장한 것으로 해석되고,임해전은 그 못 가까이에 지어진 동궁이라 불 수 있다
또 임해문과 인화문이라는 것도 임해전을 중심으로 한 연못 정원의 담에 있던 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적어도 현재의 안압지가 조성된 연대는 문무왕 무렵이나 그 이전으로 생각할 수 있을 터이다


다만 『삼국사기』에 연못의 이름을 적지 않고 궁 안의 못이라고만 기록한 것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자 이곳이 궁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고
건물의 보수가 이루어지지 못해 폐허가 되어 이름을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안압지의 원명이 '월지'(月池)이고
동궁은 월지궁으로 불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안압지 가 반월성 가까이에 있고
또 동궁의 위치가 연못 속에 비치는 아롱거리는 달을 감상하기에 알맞다는 심증적 이유 때문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안압지라는 현재의 이름은
거의 본래의 모습을 잃은 못가에 무성한 갈대와 부평초 사이를 오리와 기러기들이 날아다니자
조선의 묵객들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못은
동서 길이 약 190m,남북 길이가 190m의 장방형 평면이며,면적은 4738평,
세 섬을 포함한 호안 석축의 길이는 1285m이다
못가의 호안은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은 절묘한 굴곡으로 만들고
서쪽과 남쪽에는 건물을 배치하고 직선으로 만들었다
서쪽 호안은 몇 번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못 속으로 돌출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못가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연못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 듯 여겨진다


못 속에는 섬이 세 곳 있는데,세 섬의 크기가 각기 다르고 윤곽선 처리가 자연스럽다
발해만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 삼신도(방장도,봉래도,영주도)를 본딴 듯하다


동쪽과 북쪽의 호안에는 무산 12봉을 상징하는 언덕들을 잇달아 만들어 놓았다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3m에서 6m정도이며 선녀들이 사는 선경을 상징한다


동.북 남쪽 호안의 높이는 2.1m정도이고 궁전이 있는 서쪽 호안은 5.4m로 좀더 높다
이는 못가의 누각에 앉아 원(苑)을 내려다볼 수 있게 배려한 높이이다


못 바닥에는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옮겨다 깔았는데
못 가운데에 우물 모양의 목조물을 만들어 그 속에 심은 연뿌리가 연못 전체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연꽃이 못에 가득하면 답답하고 좁게 보일 것을 미리 방지한 지혜이다
못물의 깊이는 약 1.8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압지는 바라보는 기능으로 만들어진 궁원(宮苑)이다
지척에 있는 무산 12봉이 아득하게 보이도록 협곡을 만들고
삼신도와 무산 12봉 등 선경을 축소하여 피안의 세계처럼 만들었다


연못 서쪽과 남쪽의 건물터 등을 조사한 결과
건물터 26동,담장터 8곳,배수로 시설 2곳,입수부 시설 1곳 등이 밝혀졌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 서쪽에 있는 안압지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궁중에서 사용했던 생활용기들을 비롯하여 나무배 등 700여 점의 대표유물이 전시되고 있는데
단일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전시관 하나를 다 채운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안압지 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부장품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신라 무덤의 출토품과는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안압지의 서쪽

동.북쪽의 절묘한 굴곡과는 달리 남.서쪽은 직선으로 배치하였다

 

 *안압지의 동쪽

절묘한 굴곡이 있어 못가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못 전체가 한눈에 가늠되지 않으며

한없이 길게 이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입수부

수조에 잠시 고인물이 자연석 계단을 통해 못 안으로 들어간다

 

경주임해전지(慶州臨海殿址)


사적 제18호
경북 경주시 인왕동 26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