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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국립경주박물관 본문

☆~ 바람소리/박물관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국립경주박물관

푸른새벽* 2007. 1. 3. 23:34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국립경주박물관에 들어서면 오른쪽 뜰에 에밀레 종이 있다
시주로 바쳐진 어린아이가 종 속에 녹아들어가 '에밀레,에밀레'하고 운다고 하여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이 붙은 유명한 성덕대왕신종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야(除夜)에 서른세 번 타종(打鐘)되었으나
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타종을 금하고 있어,장중하면서도 고운 울림이 긴 여운을 남기는 신비한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고,오직 하나 에밀레종이 있을 뿐이다" 할 만큼
외형으로나 소리로나 신라의 종 가운데,아니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동종으로 인정받고 있다


종의 높이는 3.77m,둘레 7m,입지름 2.27m이고,두께는 아래쪽이 22cm,위쪽이 10cm이며 전체 부피는 약 3평방미터,무게는 20~22톤이다
전체적으로 종이컵을 엎어놓고 배흘림을 한 모양이며 종의 아랫부분이 살짝 안으로 오므려 있는 것은 우리 나라 종만이 가지고 있는 특색이다


종에 새겨진 기록을 보면
경덕왕(742~764년)이 부왕(父王)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으로 종을 만들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니,
다음 왕위에 오른 혜공왕이 경덕왕의 유지를 받들어 즉위 7년 되던 771ㄴ녀 12월에야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종을 성덕대왕을 위해 세운 봉덕사에 봉납하였으나,봉덕사는 북천의 홍수로 황폐해졌고 종을 세조 5년(1460)다시 영묘사에 걸어두었다
그러나 그 영묘사가 다시 불타버리자,중종 원년 경주 부윤인 예춘년이 경주읍성 남문 밖 봉황대 밑에 종각을 세워 옮겨두었다가
1915년 10월에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종의 맨 꼭대기에는 종을 달기 위한 용뉴(龍紐)가 있다
매우 날카로운 용 조각이 있고 그 옆에는 높이 96cm의 음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음관이 있다
이는 중국 종이나 일본 종에서 볼 수 없는 우리 나라 종의 특성이다
용뉴는 아래 지름이 14.8cm,위쪽에는 지름 8.2cm 정도가 뚫려 있다
이곳으로 잡음이 빠져나가고 소리가 길게 울린다


종의 몸을 보면 맨 위쪽(상대)에 보상화문을 둘렀다
바로 아래에 역시 보상화문을 두른 유곽을 네 곳에 만들었으며, 그 안에는 연화문으로 된 9개의 종유(鐘乳)가 있다
제일 밑의 종 입구(하대)는 보상화문 띠 사이사이에 연화문 여덟 개를 배치하였다


상대와 하대 사이는 넓은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두 곳에는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撞座)를 연꽃으로 표시하고 마주보는 두 곳에 공양 비천상과 일천 자에 해당하는 긴 명문을 새겼다
공간에 배치된 문양은 양각으로 조각하고,서로 대칭되는 위치에 배치하였다


종 밑바닥에서 안쪽을 보면 흡사 손질을 하지 않은 듯 덕지덕지 쇠를 덧바른 듯 울퉁불퉁하다
이는 부처님의 목소리에 가까운,장엄하면서도 부드러운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신비한 종소리를 내기 위해 종을 만든 이가 애쓴 흔적이다


또 이렇게 큰 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27톤의 끓는 쇳물을 거푸집에 일시에 들이부어야 하는데
이때 거품이 일어나 공기가 미처 빠지지 못하면 기포가 생긴 채 굳어버리게 된다
요즘 만든 주물에도 기포가 많은데 그때 당시의 기술로 어떻게 기포를 없앴는지 신비하기만 하다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는
"신종이 만들어지니 그 모습은 산처럼 우뚝하고 그 소리는 용의 읊조림 같아

위로는 지상의 끝까지 다하고,밑으로는 땅속까지 스며들어 보는 자는 신기함을 느낄 것이요,소리를 듣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고 씌어 있는데
신종의 소리와 모습을 설명한 가장 적절한 표현일 듯 싶다
국보 제 2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국보 제29호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