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창덕궁(昌德宮).서울 종로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창덕궁(昌德宮).서울 종로

푸른새벽* 2007. 1. 11. 23:31

 

 

 

 

 

 

 

 

 

 

 

 

 

 

 

 

 

 

 

 

 

 

 

 

 

 

 

 

 

 

 

 

 

 

 

 

 

 

 

 

 

( 창덕궁의 많은 전각들을,그것도 후원(後苑)까지 포함해서 1시간 30여분 남짓의 관람시간(강제조항)으로 돌아보기에는 너무 버거웠다.대충 세어봐도 열 일곱개나 되는 전각들인데 안내 받을 수 있는 건물은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후원제외) 그나마 안내인의 설명이라는 것이 어쩌면 제한된 동선을 따라가며 숨가쁘게 진행되는지라 각 전각의 편액 사진을 찍는 것 조차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4월에는 나 같은 사람들도 편안하게 돌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하니 그 때를 기다려보는 수 밖에.우선 몇 컷 밖에 안되는 사진으로 만족해야 한다...)

 

창덕궁(昌德宮)


조선 건국 초기,개경에서 제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이 도읍을 다시 한성으로 옮기면서 응봉(鷹峰)자락 향교동(鄕校洞)터에 이궁(離宮)으로 조성한 궁궐이 곧 창덕궁(昌德宮)이다.태종 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405년에 완공하였으니 경복궁이 창건된 지 10년만의 일이다.이궁의 창건과 관련하여,성석린.조준등의 당시 집권 관료들이 그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태종은 결국 이궁의 창건을 강행하였다.이는 태종의 왕건 강화 의지로 해석되고 있다.윤신달과 이양달이 풍수를 맡았으며,공사는 박자청이 총괄하였다.이렇게 이궁으로 창건된 창덕궁은 그러나,정궁인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 때 중건되기까지 273년 동안 역대 임금들이 이곳에서 정사를 살핌으로써,조선왕조 후기의 실질적인 정궁 역할을 하였다
이곳 창덕궁에서는 연산군.효종.현종.숙종.영조.순조.철종.고종등 여덟 분의 임금이 즉위하였다


태종 5년에 궁이 완료되고 그 궁호(宮號)를 창덕궁으로 명명했으나 이때는 아직 규모도 작았거니와 제반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따라서,창덕궁에서 주로 거처하였던 태종은 지속적으로 전각을 건립해 나아갔다.경복궁의 동쪽 방향에 입지함으로써 동궐(東闕)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창덕궁의 창건 초기 규모를 『태종실록(太宗實錄)』은 다음과 같이 외전(外殿) 74칸 내전 118칸으로 기록하고 있다


창건된 다음해인 1406년에는 인소전(仁昭殿)과 광연루(廣延樓)가 건립되었고 1411년 에는 해온정과 금천교(錦川橋)를,그리고 1412년에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세웠다 이로써 창덕궁은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태종 18년에 고쳐 짓기를 시작하여 그해 세종이 즉위하면서 마무리하였다.세종은 경복궁에 그 거처를 정해 재위 8년 10월 경복궁으로 어어하기까지 이곳에서 정사를 살피면서 경연청(經筵聽)등을 새로 지었다.단종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에 창덕궁은 '신작(新作)'이라 할 만큼의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다.세조는 후원(後苑)의 궁역을 크게 넓혔으며,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이라 하는 등 궁안의 전각 이름들을 고쳤는데,이때 개명된 이름들이 대체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덕궁 역시 임진왜란의 전화를 비켜갈 수가 없었다.경복궁.창경궁과 마찬가지로 전소(全燒)되었던 것이다.그러나,전후 복구 공사에서 창덕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가장 먼저 선조 40년(1607)에 착공되어 선조 41년 즉,광해군(光海君)즉위년(1608)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들이 건립되었다.그러나,선조의 종묘 부묘 문제,궁핍한 재정 문제 등으로 인하여 나머지 공역을 중단했다가 이듬해(광해군 원년.1609) 10월에 일차 중건된다.이때는 궁궐영건도감에서 공역을 주관했다.당시 정릉동 행궁에 머물고 있던 광해군은 그러나,창덕궁으로의 이어를 꺼려했으며 다시 1610년(광해군 2년)에 영건청 주관의 창덕궁 중건 공역을 일으켜 그해 완공하였다.중건된 창덕궁으로 광해군이 이어한 것은 그 다음해 즉,광해군 3년(1611)의 일이다


임진년 왜란이 발발하면서 의주 몽진길에 올랐던 선조가 1년 뒤 환도했으나, 모든 궁궐이 파괴되어 지금의 경운궁(덕수궁)자리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 저택을 시어소(時御所)로 삼아 승하할 때까지 그곳에서 거처하였다.그동안 국가 재정이 궁핍한 등의 이유로 궁궐을 새로 짓지 못하다가 선조 말년에 이르러서야 경복궁 등에 앞서 창덕궁부터 재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곧이어 광해군 연간에 창경궁이 복구되고 경덕궁(慶德宮.경희궁)과 인경궁(仁慶宮)도 창건되었지만 역대 임금들이 정사를 살피는 주무대는 창덕궁이었다.따라서,17세기 초반 이후 경복궁이 중창되어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19세기 후반까지 270여 년 동안 조선 왕조의 실질적인 정궁(正宮)으로서의 역할은 창덕궁이 하게 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들어서도 창덕궁은 큰 화재를 겪는다.순조 3년에는 선정전 서행각에서 불이나 인정전을 태워 다음해에 복구하였다.이후 두 번의 큰 화재는 모두 내전에서 일어나 대조전을 비롯한 주변 전각들을 태웠다.1833년(순조 33)에는
대조전.희정당.징광루.옥화당.양심각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9월까지 370여 칸을 복구하였다.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이후인 1017년,창덕궁 내전은 다시 화마(火魔)에 휩싸였다.이때 창덕궁에는 순종이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해 겨울 ,대조전 서쪽의 나인 갱의실(內人更衣室)에서 불이 나 내전 전각 거의 모두를 태우는 큰 불로 번졌다.순종은 후원(後苑)의 연경당(演慶堂)으로 피신했으며 일제는 곧 재건 공사에 착수하되 1919년에 완공키로 하며 주요 건물의 소요 재목들은 경복궁의 전각들을 철거 하여 이전키로 결정하였다.이때 철거 대상이 된 경복궁 전각들은 강녕전.경성전.연생전.교태전.함원전.만경전.흥복전 등이었다.중건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나 고종의 승하,3.1운동 등 큰 사건들의 여파로 1920년에 이르러서야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이렇게 중건된 전각들은 대조전.희정당.흥복헌.경훈각.함원전 등이다.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재는 일부 전각의 평면이나 규모를 크게 개조.왜곡하였다


이후, 왕궁으로서의 창덕궁의 위엄은 일재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일제의 고위 관리들이 인정전.희정당.주합루 등을 접견 및 향응 장소로 사용하는가 하면 전각의 태반이 훼멸되었으며,창경궁과 함께 인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과 후원 등을 일반인에게 공개.관람시킴으로써 조선 왕조의 위엄을 실추시키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마침내,1926년 4월에 조선 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면서 그나마 창덕궁은 주인 잃은 쓸쓸한 대궐로 남게 된다


창덕궁의 전각 배치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우선 정문인 돈화문이 남향으로 입지해 있고, 이 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즉 동쪽으로 꺾어 금천교를 지나면 금천교(錦川橋)를 지나면 진선문(進善門)에 이른다.진선문을 들어서서 맞은편으로 멀리 숙장문(肅章門)이 행각을 거느리고 서 있다.진선문의 왼쪽 행각 끝에서 직각으로 꺾어 호위청(扈衛廳)등이 들어 있는 행각 동쪽으로 39칸 반 길게 뻗어 숙장문 행각과 맞닿는다.진선문을 지나 다시 왼쪽으로 꺾어 인정문이 서 있다.인정문의 좌우에 있는 행랑은 각각 직각으로 꺾여 북쪽으로 뻗어 나갔으며 이 행랑으로 둘러싸여 정전인 인정전이 자리를 잡았다

 

인정전의 오른쪽으로는 편전인 선정전이 역시 행랑에 둘러싸여 있다.다시 선정전 오른쪽으로 내전 일곽이 전개되는데 선정전 옆에 희정당이 위치했고 그 뒤로 대조전이,대조전 서쪽에는 수라간이 자리를 잡았으며 대조전 뒤쪽으로는 경훈각.함원전.청향각 등이 있다.이들 내전 전각들의 후방 경사지에는 장대석을 여러 단 쌓아 화계(花階)를 꾸몄다.희정당의 동쪽으로는 성정각(誠正閣).관물헌(觀物軒)등이 있고 다시 그 동쪽 방향으로는 세자의 처소였던 동궁(東宮)터와 승화루(昇華樓)가담장을 경계로 창경궁과 접해 있다.그 남동쪽에는 낙선재(樂善齋)일곽이 펼쳐진다.화계로 꾸며진 내전 뒤쪽 언덕을 넘으면 즉,관물헌 동북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 언덕길을 넘어서면 후원(後苑)이 전개된다.이 후원은 동쪽으로는 담장을 경계로 창경궁과 이어지고 울창한 수풀 속에 크고 작은 연못과 아름다운 정자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자연과 어우러진 경관을 연출한다

 

이러한 창덕궁의 전각 배치 및 조경 기법은 정궁(正宮)이었던 경복궁과는 매우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즉,경복궁은 정문과 중문.전문.정전.편전.침전이 남북 직선 축상에 질서를 지켜 반듯하게 입지한 반면,창덕궁의 전각들은 지형 조건에 맞추어 자유롭게 배치되었다.창덕궁은 이러한 입지를 지켜오면서 임진왜란 및 여러 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부분적으로 그 배치가 변하기도 하였다.그 자세한 과정은 알 수 없으나 순조 시대 이후의 전각 배치는 「東闕圖(동궐도)」,「東蹶圖形(동궐도형)」및 「宮闕志(궁궐지)」등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후원을 포함한 창덕궁은 총면적은 현재 13만 5000여 평이다


이궁으로 창건되어 17세기 이후에는 조선 왕조의 실질적인 정궁 역할을 하였던 창덕궁,그러기에 사육신(死六臣)의 참변,연산군과 광해군의 패륜,인조 반정.임오군란(壬午軍亂),갑신정변(甲申政變)및 조선 왕조 마지막 어전회의(御前會議)등 풍운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또한 경복궁.창경궁.경운궁(덕수궁).경희궁 등 다른 궁궐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옛 전각들의 보존 비율이 높은 편이다
창덕궁은 1997년,유네스코(UNESCO)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창덕궁(후원포함)(昌德宮)


사적 제122호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문화재청자료*